프레데릭 피에루치ㆍ마티유 아롱 '미국 함정'

[이종길의 가을귀]'美國'이라는 이름의 또다른 얼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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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데릭 피에루치는 프랑스 에너지 업체 알스톰의 자회사에서 최고경영자(CEO)로 일했다. 그는 2013년 4월 14일 미국 뉴욕 JFK국제공항에서 연방수사국(FBI) 요원들에게 체포됐다. 죄목은 해외부패방지법(FCPA) 위반. FCPA는 워터게이트 사건 이후 공포된 법률이다.


당시 미 사법기관은 리처드 닉슨 대통령의 정치부정에 대해 조사하고 외국 공직자에게 불법 자금과 뇌물이 공여된 시스템을 폭로했다. 실제로 미 방위산업체 록히드는 외국에 전투기를 판매하기 위해 이탈리아ㆍ독일ㆍ네덜란드ㆍ일본 등의 정부 인사와 기업 고위 임직원에게 뇌물로 수천만 달러를 제공했다. F-104 전투기를 팔려고 줄리아나 네덜란드 여왕의 남편 베른하르트 공에게 100만달러 이상 건네기도 했다.

이후 제정된 FCPA에 따라 미 기업은 외국인 공직자에게 뇌물을 건넬 수 없다. 거래에서 달러가 사용되거나 미국에 서버가 있는 이메일을 이용한 정황이 드러나면 국적 불문하고 피의자는 구속될 수 있다.


피에루치는 2003년 인도네시아 수마트라섬 발전소 입찰에서 드러난 뇌물 사건으로 기소됐다. 알스톰 전력 부문의 글로벌 세일즈 담당으로 인도네시아 의원에게 뇌물을 제공한 일에 관여한 혐의였다. 하지만 그는 뇌물을 마련하거나 중개인을 구한 적이 없었다. 회사가 뇌물을 전달한 사실만 인지하고 있었다.

검찰 측은 이를 알고 있었다. 그러나 알스톰 최고 경영진 기소 차원이라며 협력을 요구했다. 검찰 측 회유에 넘어가지 않은 피에루치는 온갖 고초를 겪었다. 보석 신청이 기각돼 미국에서 악명 높은 교도소에 수감당했다. 내부 배신자가 될 때까지 5년간 자유를 박탈당했다.


'미국 함정'에는 피에루치가 미 법무부를 상대로 치른 험난한 투쟁이 생생하게 기록돼 있다. 미국이 어떻게 자국법으로 다른 나라의 기업과 개인을 공격했는지 폭로한다. 2008년부터 미국에 1억달러 이상의 벌금을 낸 기업은 스물여섯 곳. 이 가운데 미국 업체는 다섯 곳에 불과하다. 납부한 벌금 액수도 유럽 기업들이 낸 규모의 33% 수준이다.


'미국 함정'은 "최근 20년 동안 유럽 각국은 기꺼이 강탈을 감내했다"고 주장한다. "독일, 프랑스, 이탈리아, 스웨덴, 네덜란드, 벨기에, 영국의 기업들이 연이어 뇌물공여, 금융범죄, 제재위반의 명목으로 제재를 받고, 수백억 달러의 벌금이 미국 재무부의 주머니로 들어갔다. 프랑스 기업만 해도 130억 달러의 벌금을 납부했고, 향후 처벌을 받게 될 회사들이 줄을 이었다."


2004년만 해도 기업들이 FCPA 위반으로 납부한 벌금액은 1000만 달러에 불과했다. 그런데 2016년 갑자기 27억 달러로 폭증했다. 9ㆍ11 테러 뒤 발효된 '애국자법' 때문이다. 테러 방지라는 명분 아래 국가안보국(NSA)ㆍ중앙정보국(CIA)ㆍFBI 같은 미 정부 기관에 외국 기업과 그 직원들을 광범위하게 감시할 수 있는 권한이 부여됐다.


피에루치는 악순환이 계속될 수 있다고 우려한다. 그 근거로 미 정부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들에 촉구하는 부패방지법 입법을 든다. 프랑스는 2000년 5월 부패방지협약을 발표했다. "유럽 국가들은 미국과 달리 역외 작용을 가능하게 할 법안을 제정할 수단도, 야망도 없었는데, 이것이 그들을 함정에 빠트렸다. OECD 뇌물공여 방지 협약에 가입함으로써 사실상 미국이 유럽 기업을 기소할 권한을 부여한 것이다. 역으로 미국 기업을 공격할 수 있는 법적 수단은 갖추지 못했다."


'미국 함정'은 OECD 뇌물공여 방지 협약이 "OECD 회원국들을 함정에 빠트리는 악성 매커니즘"이라고 정의한다. 이쯤 되면 불법 자금과 뇌물 사건은 일종의 거래 명분으로 느껴진다. 실제로 미 법무부는 뇌물공여가 의심되면 혐의 기업의 CEO에게 바로 연락해 몇 가지 옵션을 제안한다. 그러면 대다수 CEO는 협상을 택한다.


부패방지 임무를 수행하는 FBI 요원은 600여 명에 이른다. 프랑스에서 마약 수사를 제외하고는 법적으로 금지된 함정수사도 마다하지 않는다. 2009년 한 비밀 요원은 가봉 국방부 장관의 로비스트로 위장해 기업 스무 곳을 찾아다니며 로비하는 체했다. 계약 성사 시 사례금 지급을 미끼로 던졌다. 증거 수집 차원에서 정보원을 회사에 침투시키기도 했다. 목표로 삼은 기업을 타격하고 껄끄러운 회사는 와해시켰으며 저항하는 기업은 대가를 치르게 했다.


군사력, 사법 무기, 정보기술로 무장한 미국의 제국주의적 논리에 다른 나라들은 대항할 여지가 없다. 대개 세 결말에 도달한다. 협조하거나, 굴복하거나, 사라지거나. '미국 함정'은 "환상을 버리고 현실을 직시해야 한다"고 역설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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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처한 환경은 조지 부시 대통령이 말한 하드 파워도 아니고, 클린턴 대통령이 말한 스마트 파워도 아니며, 오바마 대통령이 말한 소프트 파워는 더더욱 아니다. 우리는 지금 미국의 터프 파워(tough power)의 통제 아래 놓여 있다. (...) 여전히 이 일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국제 경쟁의 냉혹한 현실을 모른 척하고, 모 국가의 행동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면, 이러한 기업들은 언제라도 잘려나갈 것이다." (프레데릭 피에루치ㆍ마티유 아롱 지음/정혜연 옮김/올림/1만9800원)


이종길 기자 leemean@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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