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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포]"여기 아직 사람 살아요" 준공 50년 맞은 영화 속 '그 아파트'

최종수정 2020.05.28 07:50 기사입력 2020.05.28 05: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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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 '와우 아파트' 붕괴 이후 보란 듯이 만든 '제2시범아파트'
남대문시장 상인들, 중앙정보부 직원, 연예인 등 입주 인기
경치 좋은 남산자락에 둘러 싸인 현대식 아파트 개별화장실도 갖춰
현재 전체 353가구 중 55가구만 거주…청년예술가 임대 등 리모델링 중

서울시 중구 회현동에 위치한 제2 시범아파트. 1970년대 지어진 이 아파트는 당시 건축양식을 엿볼 수 있다. 사진=강주희 인턴기자 kjh818@asiae.co.kr

서울시 중구 회현동에 위치한 제2 시범아파트. 1970년대 지어진 이 아파트는 당시 건축양식을 엿볼 수 있다. 사진=강주희 인턴기자 kjh818@asiae.co.kr



[아시아경제 한승곤·허미담 기자, 강주희 인턴기자] "이 아파트 겉으로 볼 때랑 많이 다르죠?"


서울 남산 외곽에 조성된 소파길을 따라 언덕을 오르다 보면 왼쪽에 보이는 낡은 아파트가 하나 있다. 세월의 흔적을 말해주는 붉은 벽돌이 인상적인 콘크리트 골조의 이 아파트는 창문이 다닥다닥 붙어 있어 멀리서 보면 흡사 '닭장'처럼 보인다. 그러나 발길을 돌려 가까이 다가서면 경치 좋은 남산자락에 둘러 쌓인 10층짜리 아파트임을 알 수 있다.

이 아파트는 올해로 준공 50년(1970년 5월 준공)을 맞은 서울시 중구 회현동에 위치한 제2시범아파트다. 영화 <추격자>, <친절한 금자씨>,예능 프로그램 <무한도전> 배경 무대로 쓰이는 등 영화나 드라마에 자주 등장해 일명 '영화 속 그 아파트'라는 별명도 있다.


아파트 관리자에 따르면 26일 기준으로 전체 353가구 중 55가구만 거주하고 298가구가 살지 않는 상태다. 사람이 없다 보니 인적이 드물고, 반세기 전에 지어진 건물양식이다 보니 아파트 분위기는 을씨년스럽다. 영화에서 보이는 그 이미지가 실제 눈앞에서도 그대로 느껴진다고 보면 된다.


'세탁물 널지마십시요' 아파트 외부 난간에 입주민들이 빨래를 널다 보니, 설치된 팻말이다. 흰색의 페인트로 쓰인 글자가 이채롭다. 사진=강주희 인턴기자 kjh818@asiae.co.kr

'세탁물 널지마십시요' 아파트 외부 난간에 입주민들이 빨래를 널다 보니, 설치된 팻말이다. 흰색의 페인트로 쓰인 글자가 이채롭다. 사진=강주희 인턴기자 kjh818@asiae.co.kr



이날(26일) 아시아경제 취재진이 만난 아파트 입주민들은 '시범아파트'에 거주하고 있다는 자부심을 드러냈다.

6년 넘게 아파트 경리직원으로 근무하고 있다고 밝힌 진모(51)씨는 "(아파트가) 범죄를 주제로 한 영화 촬영장소로 많이 쓰인다. 칙칙한 분위기 때문에 많이 오지 않나 싶다"면서도 "옛날에는 세련된 곳들을 주로 찍곤 했는데 요즘은 낡은 것들에 더 매력을 느끼는 이들이 있는 것 같다"고 설명했다.


이어 "요즘은 촬영하는 분들이 오면 이 아파트를 보고 '아름답다'는 반응을 보이기도 하더라. 예를 들어 페인트가 벗겨진 곳들을 보고 멋스럽다고 느끼는 이들도 있다"면서 "일부러 옥상 같은 곳에 올라가서 사진을 찍는 이들도 있었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다른 분들이 보시기에는 이 아파트가 위험해 보인다고 느낄 수 있지만, 서울시에서 나와서 이 아파트의 보수공사나 점검 등을 맨날 하고 계신다"고 덧붙였다.


26일 오전 11시께 아파트 복도 전경. 입주민이 아닌 외부인들은 이 복도를 마주할 때 일부 놀라는 사람도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사진=허미담 기자 damdam@asiae.co.kr

26일 오전 11시께 아파트 복도 전경. 입주민이 아닌 외부인들은 이 복도를 마주할 때 일부 놀라는 사람도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사진=허미담 기자 damdam@asiae.co.kr



주민들은 어두컴컴한 복도, 을씨년스러운 분위기에 크게 신경을 쓰지 않는다고 강조했다.


주부 A(83) 씨는 "이 아파트가 원래 좀 컴컴하고, 언덕 위에 있고, 사람도 많이 없어서 기분이 안 좋은 느낌이 있다. 우리 집은 4층인데 주변엔 다 빈방이라 밤엔 좀 무섭기는 하다"라고 말하면서도 "범죄 영화 같은데 많이 나오는 것 같은데 그래도 영화니까 크게 신경쓰지는 않는다"고 말했다.


이어 "여기서 15년 정도 살았는데 실제로 범죄나 무슨 안 좋은 일이 일어난 적은 없었다. 다만 지나가는 사람들이 옛날 아파트고 어두침침하니까 좀 꺼리는 것 같다는 느낌은 있다"고 전했다.


또 하나 이 아파트에서의 특이한 것을 찾아보면, 10층 규모지만 엘리베이터가 없다. 아파트 두 곳에 구름다리를 두어 6층과 7층으로 직접 진입할 수 있도록 했다.


1층으로는 외부 계단을 통해 출입할 수 있도록 했다. 아파트 자체가 산자락에 있다 보니 계단이 상당히 가파르다. 1층 등 낮은 층에 사는 주민들은 공동장독대를 마련해두고 함께 김치를 담갔다.


10층 규모의 아파트지만, 엘리베이터는 없다. 대신 아파트 두 곳에 구름다리를 두어 6층과 7층으로 직접 진입할 수 있도록 했다.사진=강주희 인턴기자 kjh818@asiae.co.kr

10층 규모의 아파트지만, 엘리베이터는 없다. 대신 아파트 두 곳에 구름다리를 두어 6층과 7층으로 직접 진입할 수 있도록 했다.사진=강주희 인턴기자 kjh818@asiae.co.kr



아파트가 가파른 언덕에 위치하고, 내부에 엘리베이터가 없어도 주민들은 불편함을 나타내지 않았다.


아파트 인근에서 만난 윤모(72)씨는 "엘리베이터가 없어서 불편하긴 하지만 원래부터 없었으니까 그냥 그러려니 하면서 지내고 있다"면서 "아무래도 조용하고, 음침하니까 영화 촬영 하러 많이 왔다고 하는데, 요즘은 그런 것도 별로 없다"고 말했다.


여기서 문득 이 아파트 이름에 물음표가 찍힌다. 도심 인근 아파트만 둘러봐도 '파크(park)', '에듀(edu)', '리버(river)', '센트럴(central)' 등의 이름을 하고 있다. 대부분 공원과 호수 등이 단지와 가까워 주거환경이 쾌적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시범아파트'에는 어떤 사연이 있을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시범'은 안타까운 사고에서 비롯했다.


지난 1970년 4월8일 새벽 '와우 시민아파트'가 붕괴하는 참사가 일어났다. 이후 양택식 서울시장이 "이곳을 '시범'삼아 튼튼하게 지으라"고 말했고, 아파트는 '시범 아파트'란 이름을 달게 됐다.


옥상으로 향하는 문. 외부 빛이 어두운 복도로 스며들어 인상 깊은 모습을 보인다. 옥상으로 향하는 문은 잠금 상태를 유지하고 있다. 사진=강주희 인턴기자 kjh818@asiae.co.kr

옥상으로 향하는 문. 외부 빛이 어두운 복도로 스며들어 인상 깊은 모습을 보인다. 옥상으로 향하는 문은 잠금 상태를 유지하고 있다. 사진=강주희 인턴기자 kjh818@asiae.co.kr



애초 이곳은 철거민을 위한 아파트로 지어졌다. 국유지에 들어선 무허가건물 278가구를 헐어낸 자리에 아파트를 지어 315가구를 입주시켰다.


그러나 비싼 입주비 등으로 인해 철거민들은 소수만 들어왔고, 인근 남대문시장 상인들, 중앙정보부 직원, 경찰, 방송사 PD, 은방울 자매 등 연예인들이 입주했다.


당시 아파트가 9~10평에 공중화장실인 데 비해 이 아파트는 16.38평(실평수는 11.5평)에 개별화장실을 갖췄으니 꽤 고급 아파트에 속했다. 일종의 선망의 대상이었던 셈이다.


1989년 3월 공전의 히트를 기록한 가요 '아파트'의 주인공 가수 윤수일 씨도 이 아파트를 거쳐 갔다.


그러나 준공 반세기가 지난 지금 이 아파트는 세월의 흔적만 간직하고 있을 뿐이다. 지금은 아예 볼 수 없는 아파트 구조인 천장에 쇠파이프로 연결된 배수관이 그대로 보이는가 하면, 전반적으로 허름한 모습을 보일 뿐이다. 현관문은 철과 나무 소재로 만들어져있다.


어두운 복도가 있는 반면, 빛이 잘 들어오는 복도도 있다. 양 옆으로 길게 늘어진 나무로 만들어진 현관문이 보인다. 사진=허미담 기자 damdam@asiae.co.kr

어두운 복도가 있는 반면, 빛이 잘 들어오는 복도도 있다. 양 옆으로 길게 늘어진 나무로 만들어진 현관문이 보인다. 사진=허미담 기자 damdam@asiae.co.kr



엘리베이터가 없어 가파른 계단을 걸어오던 90대 김모씨는 "돈 많은 사람은 이미 다 나갔고, 돈 없는 사람들만 남았다. 아파트에 사람도 별로 없다"면서 "내가 이 아파트에 처음 들어왔을 때가 6년 전이었다. 그때는 사람이 많이 살았다. 근데 지금은 다 나갔다"고 말했다.


이어 "몇년 전부터는 리모델링과 재개발을 한다는 소리가 있었다. 이전부터 이렇다저렇다 말들은 많았는데 실제로 언제 할 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그는 "재개발에 대한 기대도 별로 없다"고 덧붙였다.


이 아파트는 지난 2004년 11월19일 재난 위험 시설물 D급으로 지정됐다. 이후 서울시와 입주민들은 아파트 철거를 놓고 보상금 등 지난한 합의 과정을 가졌다. 그러다 최근에는 철거가 아닌 리모델링으로 가닥을 잡았다.


아파트 내부로 향하는 한 출입문.사진=강주희 인턴기자 kjh818@asiae.co.kr

아파트 내부로 향하는 한 출입문.사진=강주희 인턴기자 kjh818@asiae.co.kr



서울시에 따르면 이 아파트는 이른바 '아트 빌리지'로 탈바꿈할 전망이다. 디자인 관련 상가, 공방, 카페 등이 근린생활시설로 들어선다. 청년 예술가들이 임대 형식으로 이 아파트의 또 다른 입주민이 될 예정이다.


SH공사가 공고한 '회현 제2시민아파트 리모델링 사업 설계공모'에 따르면, SH공사는 전체 연면적 1만7932㎡ 중 주거 공간 9602㎡(54%) 가량만 설계해 현재 352가구를 253가구 규모로 축소할 계획이다.


1~2인 가구로 구성된 청년예술인에게 200가구를 임대하고 일부는 아직 아파트에 남아 거주하는 기존 입주민이 거주하도록 할 예정이다.


또한 SH공사는 이 아파트의 역사적 가치를 보존하기 위해 재생 리모델링을 추진한다는 점에서 층수를 현행 지하 1층~지상 10층 규모로 유지하기로 했다.


주거 공간도 현재와 같은 전용면적 38㎡(약 11평)에 거실과 방 2개, 주방, 화장실 구조를 유지할 계획이다.




한승곤 기자 hsg@asiae.co.kr허미담 기자 damdam@asiae.co.kr강주희 인턴기자 kjh818@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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