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 체셔 '단숨에 읽는 미술사의 결정적 순간'

[이종길의 가을귀]다비드가 굳게 입을 다물 때 '매너리즘 미술'은 시작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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찡그린 눈썹과 굳게 다문 입. 먼 곳을 응시한 눈에 긴장감이 역력하다. 목선의 핏줄까지 부풀어올랐다.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1475~1564)가 '다비드'를 만들며 불어넣은 엄숙한 결의다. 전투를 결심한 다비드의 경직된 분위기를 사실적으로 표현했다.


다비드는 엄청난 거구의 골리앗을 돌로 때려 쓰러뜨렸다. 작지만 강한 승리의 표상이 됐다. 이탈리아 피렌체의 시민들은 이를 독립과 자유민권으로 받아들였다. 교황과 황제를 견제하고 도시의 독립을 지키고자 ‘다비드’를 계획했다. 미켈란젤로는 서둘러 담당자들을 찾아갔다. 자기가 이 작업에 적합한 인물이라고 거듭 설득했다.

리 체셔의 '단숨에 읽는 미술사의 결정적 순간'에는 서양 미술의 흐름을 바꿔놓은 사건 50가지가 소개돼 있다. '다비드'는 다섯 번째로 나온다. 선정된 이유는 다음과 같다.


"미켈란젤로는 '다비드'를 통해 르네상스의 정수를 보여주는 최고의 예술적 재능을 증명했으며, 16세기 미술사에서 피렌체와 이탈리아의 지배력을 더욱 확고히 하는 계기를 만들었다."

미켈란젤로는 이 작품으로 유명해졌다. 그 뒤 로마 시스티나 성당 천장화, 성 베드로 대성당 재건축 등 중요한 작업을 도맡았다. 다른 예술가들은 미켈란젤로 조각상에 깃든 고도의 기술을 좀처럼 모방하지 못했다. 대신 역동적이면서 감정적으로 격양된 회화 방식을 흉내냈다. 새로운 사조인 매너리즘 미술을 발달시킨 것이다.


이 책이 '다비드' 다음으로 소개하는 결정적 순간은 라파엘로 산치오(1483~1520)가 교황의 방에 그린 벽화 '성체논쟁'이다. 라파엘로는 교황이 화가들을 모집한다는 소식에 교황의 조카 우르비노 공작(1490~1538)에게 추천서까지 부탁했다. 그는 예상보다 일찍 '성체논쟁'을 완성했다. 이에 감탄한 교황은 다른 화가들의 작업을 중단시켰다. 그리고 라파엘로만 자기 집무실에 벽화를 그리도록 조치했다.


라파엘로는 하루 아침에 유명인사가 됐다. 37세로 사망하기 전까지 미술계에서 굉장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가까운 시스티나 성당에서 혼자 힘들게 천장화를 그리던 미켈란젤로는 라파엘로의 사망 소식에 심경이 복잡했다. 그는 수년간 라파엘로가 자신의 작품을 표절했다고 비난했다. 라파엘로가 친구인 건축가 브라만테(1444~1514)의 도움으로 자기 작품을 몰래 훔쳐봤다는 게 그 이유다.


미켈란젤로의 폭로에도 라파엘로의 명성은 19세기까지 이어졌다. 라파엘로는 이상적인 조화를 구현한 화가의 본보기로 추앙받았다. 19세기 중반 영국에서 결성된 라파엘전파(前派) 형제회는 이런 흐름에 보기 좋게 제동을 걸었다. 당시 영국의 비평가 존 러스킨(1819~1900)은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유럽 미술사의 비운은 바로 그때부터 시작되었다. …라파엘로를 비롯한 동시대 위대한 화가들의 작품을 통해 표현된 이상화된 인물과 완벽한 솜씨는 모든 화가가 작품의 외적인 완벽성과 아름다운 형태만을 추구하도록 만들었다. 그때부터 작품의 의미보다는 기술에만 중점을 두었고, 진실보다는 미적인 아름다움만이 관심의 대상이 되었다."


라파엘전파는 라파엘로를 이상적 기준으로 삼는 영국 왕립미술원의 제한적인 가르침에 반발했다. 왕립미술원 초대 원장 조슈아 레이놀즈 경(1723~1792)을 '슬로슈아 경'이라고 부르며 조롱했다. 비밀 단체 라파엘전파의 존재가 드러나자 예술계의 기득권 세력은 격분했다. 예수나 동정녀 마리아 같은 성스러운 인물들을 자연주의적 관점으로 묘사한 것까지 싸잡아 비판했다.


젊은 화가들이 주도한 라파엘전파의 혁신은 훗날 많은 사람의 관심을 끌었다. 특히 산업화 전 세계에 대한 낭만주의적 시각은 시간이 흘러 윌리엄 모리스(1834~1896)가 주도한 미술과 공예운동의 발단이 됐다. 최초의 아방가르드 예술 운동으로 평가되기까지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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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들에게서 한 가지 공통점이 발견된다. 창조한 작품을 그저 누가 봐주기만 기다리지 않았다는 점이다. 어느 시점에 누군가는 중요한 결정을 내렸고 무언가를 선택하기도 했다. 후기 인상주의 화가 빈센트 반 고흐(1853~1890)의 말대로다. "위대한 성과는 갑작스러운 충동으로 이룰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느리지만 여러 번 연속된 작은 일들이 모여 비로소 완성된다."


이종길 기자 leemean@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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