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제 옷 나부랭이 팔아가며 버틴다.
우리나라 어느 도심을 둘러봐도 어렵지 않게 들을 수 있는 탄식이다. 인구 20만쯤 되는 도시 한 복판에서조차 1층 상가 임대 구하는 필사지가 즐비하다는 실상에서부터 출발해야겠다. 번듯하게 새 건물은 올렸는데 1층 가게 통유리에 먼저 붙느니 점포 임대 표식과 전화번호다. 그 옆도 그렇고 길 건너 목 좋은 저쪽 건물도, 이쪽 빌딩도 그야말로 한 집 건너 공실이다.
상당수는 아예 구제 장사로 급변신 했다. 노상 비워둘 순 없으니 1~2개월 단기임대로 돌려 반짝 팔기 좋은 구제 옷이나 잡화를 취급하는 가설 매장 전성시대가 온 것인가? 무슨 떴다방 같은 그런 기약 없는 구제 물품 가게들이 전국 도심 상권 미관을 심히 해치기 시작하며 전에 없는 묵직한 신호를 보내온다. 코오롱 스포츠, 빈폴 같은 대기업 브랜드숍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며 저마다 각 지역 대표 상권을 나름 형성했던 중견, 중소 소매상들이 뭉텅이로 사라져 버렸다. '점포 정리' 현수막마저 걷어낸 그 자리에 듬성듬성 '구제'라고 갈겨쓴 골판지가 나붙어 흔들거리는 비현실적인 광경이다.
서울은 어떤가? 올해 2분기 용산구 이태원 상권의 3층 이상 또는 연면적 330㎡ 초과 건물 중대형 상가의 경우 공실률은 26.5%에 달했다고 한국감정원이 밝혔다. 서울 전체가 11.5%이고 청담이 17.6%, 테헤란로가 15.1%, 광화문이 12.6%의 중대형 상가 공실률을 나타냈다.
오피스 타운 1번가인 광화문의 경우 중대형 상가 공실률이 지난해 4분기 2%에 불과했다가 올해 1분기 10%로 수직 상승했고 2분기에는 12.6%로 치솟았다. 청담동은 지난해 3분기엔 2.5%로 괜찮았으나 4분기에 11.2%로 급등한 뒤 올 2분기에는 17.6%까지 올라버렸다. 신사동 가로수길이며 서초, 도산대로, 명동, 종로 신촌 등지도 어느 한 곳 변변한 데가 없다.
지방은 무슨 말을 더하겠는가. 구제 옷 도미노가 나날이 솔잎흑파리처럼 사방팔방 퍼지고 있다. 올 2분기 기준 중대형 상가 공실률은 전국 평균이 이미 11.5%까지 올라왔고 경북(18.3%)과 세종(17.3%), 전북(17.1%), 울산(16.9%), 충북ㆍ대구(14.9%), 전남(14.1%) 등은 평균을 웃돌았다. 지방은 상가 노후화, 인구 감소까지 겹쳐 더 심해 보인다. 빈 사무실도 늘어 깡통 전세, 깡통 주택도 속출하고 있다.
이렇다보니 도심 공동화나 젠트리피케이션 (gentrification) 같은 정밀한 진단도 점차 부질없어 뵌다. 도심이든 부심이든, 변두리든 모조리 비어가고 있는데다 고급 상업, 주거 지역이 형성되는 즉시 불황의 늪으로 빠져드는 동반 부진까지 빚어지고 있으니까. 실제로 커피계의 애플이라는 '블루보틀' 2호점이 삼청동에 들어섰지만 상인들은 아무 효과 없다며 한숨짓는다는 뉴스가 실물 유통의 총체적 난국을 잘 대변해주고 있다.
정말 이래서는 도시재생도 재활성화도, 젠트리피케이션 방지책도 모든 백약이 무효가 될 판이다. 인터넷 모바일 쇼핑과 검색을 일망타진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경기 불황과 인건비 상승추세를 당장 억제할 수도 없으니 정책적으로도 참 난감한 상황이 되었다.
때문에 요즘 줄 잇는 구제 물품 가게 출현이 예사롭지가 않다. 역설적이게도 우리 경제 근본 자생력이 강화되는 기운을 보여주는 측면도 눈에 띈다. 오랜 내공인진 몰라도 가게를 공실로 방치하는 무기력함 대신 몇 푼 남지도 않는 구제 장사를 하고 만다는 지역 유지들의 끈질긴 생명력에서 전기를 느끼지 않을 수 없다. 남에게 단기 임대차 주느니 아들 손자 똘똘 뭉쳐 가업으로 전환해 버틴다는 슬기로운 불경기 생활 자구책도 견고하다.
시골, 지방뿐이 아니다. 아파트 대단지의 구제 장사 버전이라고 할 동네마켓 기능이 살아 꿈틀대고 있다. 인터넷 중고나라보다 더 낮은 데로 임하여 급기야는 친정 언니 찻잔까지 5백 원, 1천 원에 내다 파는 유사 지하경제 가업 비즈니스가 성업 중이다.
자본주의 경제대국 한국에서 이런 구제 장터 폭증이 나타난 것은 매우 특이한 현상이다. 자급자족 가업 지하경제가 제대로 막을 올렸음을 뜻한다. 이것은 흡사 정치가 불안하고 윤리가 무너지고 사회, 지역 갈등과 대립이 극심해진 역사적 배경에 따라 탈 중앙, 가업 중심 자급자족 자구, 자경으로 일찌감치 전환한 이탈리아와 같다. GDP의 최대 30~40% 정도까지 지하경제에 내어준 이탈리아는 그렇게 일단 보릿고개는 이겨냈다. 하지만 되풀이되는 무능하고 부패한 정부와 이에 맞서 만연해진 무정부 정서 그리고 마피아 지배라는 암운을 불러오고 말았다.
이제 갓 구제 상점으로 개막한 한국식 자급자족 가업 버티기가 이탈리아식 지하경제의 폐단과 전철을 따르고 말 것인가? 아니면 도덕적 해이에 빠진 정객들을 기어이 솎아내고 신상 혁신 제품들로 가득 채워 놓은 건강한 유통시스템으로 탈바꿈할 수 있을 것인가?
꼭 봐야 할 주요 뉴스
"내 투자금 손실 나도 정부가 막아준다"…개미들 ...
심상민 성신여대 미디어커뮤니케이션학과 교수, 한국문화경제학회장
<ⓒ투자가를 위한 경제콘텐츠 플랫폼, 아시아경제(www.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