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 중후반, 클래식 비즈니스에서 홍콩이 담당한 역할은 영연방 공연 예술 산업의 전진기지였다. 1973년 시작된 홍콩아트페스티벌(香港藝術節)은 1840년대부터 총독제를 통해 홍콩을 식민통치한 영국이 컨텐츠를 제공하고, 계획도시 홍콩에서 부를 축적한 토착기업이 자본을 대면서 아시아 최고의 예술축제로 웅비했다.
1997년 7월 1일 홍콩의 주권 반환식에서 영국 국가인 ‘신이여 여왕을 보호하소서’가 울려 퍼지는 동안, 영국 국기 유니언잭과 홍콩기가 내려가면서, 홍콩 클래식 산업의 위상도 저물었다. 중국 국기 오성홍기과 홍콩행정특구기가 게양되면서 울려 퍼진 중국 국가 ‘의용군 행진곡’을 흥얼대는 홍콩 출신은 지금도 소수다. 홍콩 필하모닉, 홍콩 신포니에타 등 홍콩 소재 음악 조직도 20세기말 핵심 인재의 엑소더스로 신음했다.
도널드 창-렁춘잉-캐리 람 등 홍콩 출신 행정장관의 임명으로 항인항치(港人港治)의 원칙은 표면적으로 유지되지만 "고도의 자치를 보장하겠다"는 중국 정부의 약속을 불신하는 홍콩 시민의 저항은 우산혁명식 정치 시위에 머물지 않고, 홍콩의 문화적 독자성을 지키는 방향으로 진화한다.
홍콩에 서구식 민주주의를 허용하기 어려운 중국 정부에 맞서, 홍콩 시민은 특수성을 확보하기 위한 수단으로 다시금 서양 클래식을 주목한다. 문화혁명 시기 서양 음악을 금지했던 본토와 달리, 외부 클래식 생태계에 홍콩은 대만과 함께 중화를 대표했다. 종족적으로 한족(漢族), 언어적으로 광둥인(廣東人)이지만, 중국 본토와의 차별을 위해 공용어인 영어와 클래식의 중요성을 재인식한다. 민주주의와 중국의 정체성 가운데 어느 가치에 비중을 둘 것인지 입장 표명이 어려운 홍콩 토착 자본에 클래식 산업은 경마와 함께 영국령 시절의 홍콩을 공개적으로 회고하고 지지하는 창구다.
캐세이퍼시픽 대주주인 영국계 복합기업 스와이어 그룹을 위시한 홍콩계 자본의 강력한 후원으로 홍콩 필하모닉은 2010년대 비약적으로 발전했다. 1947년 사교 클럽에서 결성된 아마추어 악단을 모태로, 홍콩 총독의 주도로 프로 악단으로 거듭난 홍콩 필은 네덜란드 출신의 에도 데 바르트(2004-2012), 얍 판 즈베던(2012-2022)을 감독으로 영입하면서 성공 가도를 달린다. 특히 판 즈베던이 뉴욕 필하모닉 감독에 임명되고, 홍콩 필이 2019년 영국 그라모폰지 선정 ‘올해의 오케스트라’에 선정되면서 아시아를 대표하는 악단으로 부상했다. 중국 본토 오케스트라와는 다른 세련된 사운드가 홍콩 필의 매력이다.
홍콩 클래식 산업의 또 다른 아이콘이 한국을 찾는다. 이달 23일 세종문화회관 대극장에서 내한공연을 갖는 아시안 유스 오케스트라는 1987년 홍콩에서 결성된 비영리 조직이 모태다. 세계 각지의 음악 인재를 홍콩에 불러 3주 동안 훈련시키고, 오케스트라를 편성해 세계 투어를 나선다. 미국 출신의 바이올리니스트 겸 지휘자 리처드 폰치어스가 성룡을 비롯한 홍콩 재력가들의 후원을 이끌어 조직을 완성했다. 명 바이올리니스트 예후디 메뉴힌의 관여로 창립 초기부터 요요 마, 사라 장 등 세계적 명성의 음악가들이 참여했고, 첼리스트에서 지휘자로 변신한 장한나도 악단을 지휘했다. 바이올리니스트 김영욱, 강동석도 함께 할 만큼 한국 음악가들과의 인연이 각별하다.
2019년 아시안 유스 오케스트라의 투어는 동북아의 격랑과 함께 한다. 베이징, 상하이를 거쳐 시위가 한창인 홍콩을 찾았고 외교 관계가 불안정한 서울과 도쿄를 방문한다. 한국 공연의 협연자는 일본 바이올리니스트 모네 하토리다. 일본 클래식 산업이 향후 10년 앞을 내다보고 집중적으로 투자하는 인재다. 하토리는 브루흐 바이올린 협주곡 1번을 연주하고, 폰치우스는 림스키 코르사코프의 세헤라제드를 준비했다.
홍콩 기업의 클래식 지원은 결국 반부패 청산을 명분으로 시진핑 정부가 중국 사업가들을 다루는 방식을 면밀히 지켜본 홍콩 자본이 유사시 홍콩 시민의 지원을 확보하려는 보험 성격이 짙다. 홍콩 필의 성장과 아시안 유스 오케스트라의 존속을 통해 음악과 정치 사이에 건전한 긴장 관계를 유추해본다.
한정호 객원기자ㆍ에투알클래식&컨설팅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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