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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충훈의 돛단Book]사법재판, 당연히 불공정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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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덤 벤포라도 著 '언페어'
목격자는 세번에 한번꼴로 범인 잘못 지목
판사는 일과 패턴·정치적 이념 따라 판결
인간적 한계 인정하고 확증편향 주의해야
CCTV·유전자 검사 등 과학 기술로 보완

"만약 그에게 죄가 없다면 신이 그를 구원하리라."

유럽 중세의 신성 재판은 으레 이러한 종교지도자의 선언으로 시작했을 것이다. 심판대에 선 죄수는 기름이 펄펄 끓는 가마솥에서 반지를 끄집어내거나, 불타는 숯 위를 걷고, 물속에서 숨을 참으며 신에게 자신의 결백함을 증명했다. 종교지도자는 살이 타는 고통에 울부짖는 죄수들을 보여줌으로써 도덕의식이 없는 군중을 교화할 수 있었을지 모른다. 하지만 범죄의 진위를 판단하는 올바른 재판 방식이 아니었음은 분명하다. 그렇다면 지금은? 과연 인간중심적 사법 제도는 과거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과학적이고 공정한 심판을 내리고 있을까.


수사에서 재판까지 모두 '불공정'하다= 미국 필라델피아주 드렉셀대학에서 법학교수로 재직 중인 애덤 벤포라도는 "전혀 아니올시다"고 답한다. 그는 "우리 후손들은 우리가 선조들의 신성재판을 보고 받는 충격 못지않게 오늘날 우리가 용인하는 정해진 절차와 체계적인 불공정에 충격을 받을 것"이라고 했다. 벤포라도의 저서 '언페어(unfair)'는 범죄심리학ㆍ신경과학의 최신 연구결과와 인상적인 소송 사례를 들어 어떻게 미국의 재판 절차가 자국이 소중히 여기는 가치를 지키지 못하고 오히려 사회 최약자를 위태롭게 하는지 보여준다.

"선한 의도를 가진 선한 사람이 결과적으로 가장 끔찍한 부정의(不正義)를 만들어낼 수 있다"는 것이 이 책의 핵심 메시지다. 저자는 부정의는 우리 법률 구조 자체에 내재돼있으며, 매일 매 순간 결과에 영향을 미친다고 말한다. 수사, 재판, 처벌 과정에 참여하는 모든 관계자들에게는 확증 편향과 직관적 사고로 인한 판단 미스가 필연적으로 따라다닌다. 이들의 심리를 이해하지 않고선 불공정을 제대로 인식하고 해결책을 만들 방법이 없다.


한 예로 재판정에 서는 '목격자'를 보자. 범죄 영화나 드라마에선 목격자의 증언대로 그린 몽타주 한 장이 범인 검거에 결정적 역할을 하는 장면이 종종 등장한다. 현실은 정반대이다. 강간죄로 28년형을 선고받은 존 제롬 화이트는 목격자의 어긋난 직관이 낳은 대표적인 피해자다. 그는 피해자가 무려 세 번이나 자신을 범인으로 지목하는 바람에 억울한 감옥살이를 했다. 더 무서운 건 당시 수사당국이 피해자에게 보여준 용의자 대열 사진에 진짜 범인이 있었다는 사실이다. 벤포라도는 이 용의자 대열 사진을 언페어 집필 과정에서 만난 가장 경악할 사례로 꼽았다. 한 연구결과에 따르면 목격자가 용의자 대열을 보고 범인을 선택할 때 대략 세 번에 한 번꼴로 무고한 사람을 지목한다. 저자는 "세 번에 한 번은 브레이크 등이 오작동하는 차량이나 세 환자 가운데 한 명에게 잘못된 약을 건네는 병원을 참고 용인할까? 그렇다면 왜 사법 제도는 이대로 좋다는 주장을 용인하는 것인가"라고 비판한다.


'판사'는 또 어떤가. 이스라엘 가석방 심의위원회에서 일하는 판사들의 일과시간별 판결 패턴을 보자. 1000건의 결정들을 분석해보니 하루 업무 시작 시간이나 식사를 하고난 이후에 재소자에게 가석방을 허락할 확률이 상당히 높았다. 재소자에게 유리한 판결을 내릴 확률이 65% 정도였다. 반면 퇴근이 다가왔을 때나 식사 휴식 시간 직전에는 호의적인 판결이 제로(0) 수준이었다. 이 가석방 심의위는 이스라엘 전체 가석방 신청의 40%를 처리하는 곳이다. 게다가 판사들은 좀처럼 자신이 편향되게 행동한다는 생각을 하지 않는다. 판사들은 순수한 이성보다는 직감에 휘둘린다는 것을 부정한다. 하지만 미국의 많은 판사들이 본인의 정치적 이념이 가미된 판결을 내리고 있다. 판사 본인의 취향만을 반영하는 웹 브라우저로 재판 참고 자료를 찾기도 한다. 자신도 모르게 편향된 판결을 내리게 될 수밖에 없다. 저자는 "어쩌면 우리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은 '로봇 판사'가 아닐까 싶다"고 말했다.

이를 바로잡을 방법은 자신의 직감을 끊임없이 의심하고 모니터링하는 습관이다. 이른바 건강한 의심이다. 저자는 그에 맞춤한 예로 뉴욕주 대법원 판사 프랭크 바르바로를 든다. 그는 '백인' 도널드 케이건이 '흑인' 웨이블 윈트를 총으로 쏘아죽인 사건을 수사했다. 바르바로는 케이건을 '인종차별주의자'라는 프레임에 가뒀고 15년형을 선고했다. 하지만 14년 후 바르바로는 자신의 판결이 잘못됐음을 깨달았다. 그는 케이건이 윈트의 위협적인 행동에 정당방위를 행사했으며 판결을 뒤집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바르바로는 말한다. "법 제도는 우리가 공정했는가라는 질문에 매우 민감해질 필요가 있습니다. 실수를 저지르지는 않았는지 자꾸 물어야 합니다. 그것이 지금도 제가 노력하고 있는 부분입니다."


'인간'이라는 한계를 인정하라= '부(富)'도 재판 결과를 좌우하는 주요한 불공정 요소다. 미국에선 이른바 '재판 컨설턴트'라 불리는 이들이 부유한 범죄자에게 달라붙어 유리한 판결을 받도록 전략을 짠다. 그들은 클라이언트를 위한 증언 준비와 언론 대응뿐만 아니라 심리학과 마케팅 조사 결과를 수집하고 때로는 모의재판을 열기도 한다. 결국 '유전무죄 무전유죄'의 간극은 계속 넓어진다. 저자는 "최상층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범죄가 진정 남는 장사다. 그리고 버는 돈이 많을수록, 편법을 쓰는 데 도움을 줄 사람들에게 접근하기가 쉬워진다"고 했다. 그는 또 "회사의 내부 거래, 불법 회계, 증권사기 등에 관여하는 이들은 공정한 거래에서 얻는 것보다 많은 것을 얻는다"고 했다.


태생적으로 불공정한 사법 제도를 보완할 방법은 무엇일까. CCTV나 유전자 검사처럼 발전된 기술이 한몫을 담당할 것이다. 최근엔 경찰이 순찰을 돌 때 주위의 범죄 관련 정보를 알려주는 스마트폰 프로그램도 나왔다. 이 외에도 법 제도 밖에서 범죄율을 줄일 창의적인 아이디어를 생각해야 한다. 저자는 대표적인 아이디어로 '가상(virtual) 재판'을 든다. 아바타를 사용한 가상 재판을 도입하면 검사, 변호사, 판사 모두가 인종, 성별 등에 따른 편견을 제거하는 데 도움을 줄 수 있다. 불완전하고 결함 많은 인간의 지각, 기억, 판단에 의존하는 정도를 줄이는 것이 현 사법 제도가 가진 많은 문제점을 해결하는 지름길이라는 이야기다. 박충훈 기자 parkjovi@


(애덤 벤포라도 지음, 강혜정 옮김 /세종/2만원)




박충훈 기자 parkjovi@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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