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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론] 선생님 오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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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이 점점 더 짧아지나 봅니다. 음악에 견주면, 춘하추동 네 악장(樂章)이 강물처럼 흐르던 일 년이 이제는 '여름과 겨울' 두 악장입니다. 봄가을은 그저 인터미션(휴식시간) 정도로 여겨야 할 것 같습니다. 꽃그늘에서 찍은 몇 장의 사진이 한 철 기억의 전부. 올봄도 그렇게 황황히 서둘러 떠나는 모양입니다.

일본어의 봄 '하루(はる)'의 뿌리가 한국어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듭니다. '열흘 붉은 꽃' 찾기가 정말 어렵습니다. 허다한 봄꽃들이 사나흘 버티는 것도 힘겨워합니다. 차례도 없이 한꺼번에 피었다가 집니다. 매화와 벚꽃이 장미나 아카시아와 어깨동무를 할 판입니다. '늦봄'과 '초여름'도 쓸모없는 말이 되는 것은 아닐까요.


오월이 있어서 다행입니다. 낙화의 서운함을 잊게 하는 초록 이파리들이 고맙습니다. '사람이 꽃보다 아름답다'는 노랫말이 사뭇 실감납니다. 그만큼 곱고 어여쁘고 소중한 존재들이 줄지어 옵니다. 어린이가 달려옵니다. 어머니 아버지가 옵니다. 그보다는 느린 걸음으로, 저만치 부처님과 스승님이 오십니다.

어린이와 어버이, 부처와 스승. 공통점이 있습니다. 모두 순우리말입니다. 하나같이 거울 같은 이들입니다. 어린이가 대표입니다. 아무 전략과 전술이 없이도 넉넉한 어린이 앞에, 갖은 꾀를 내고 궁리를 해도 곤궁한 어른의 살림살이를 비춰봅니다. 영국시인 워즈워스가 '어린이는 어른의 아버지'라고 읊은 뜻을 헤아립니다.


곰곰 생각해보면 어린이 날, 어버이 날, 부처님 오신 날이 전부 '스승의 날'입니다. 불쑥 꺼낸 생각이 아니라, 아주 오래 묵은 믿음입니다. 사람이 부끄럽지 않게 살아야 할 이유를 깨우치던 말들의 풍경을 짚어보면 알 수 있습니다. '애들이 보고 있다'는 말의 지엄함은 '하늘이 알고 있다'는 경책(警策)과 나란합니다.


'집에서 그렇게 가르치더냐.' '학교에서 무엇을 배웠더냐?' '결국은 부처님 손바닥 안에 있었구나.' 우리 언어습관에 고스란히 담겨있는 생각들에서 '세상이 거대한 학교'임을 깨닫습니다. 오월엔 누구나 학생이거나 수험생입니다. 가까이 오시는 선생님들 앞에 나아가, 시험을 치고 성적표를 받아야 합니다.

아들딸의 문제에 답합니다. 부모님께 받은 숙제가 얼마나 남았는지 살핍니다. 스승의 잣대를 꺼내들고 '생각'의 길이를 잽니다. 절대자의 저울에 탁한 두뇌와 때묻은 심장을 올려놓습니다. 정기검사장의 자동차처럼 판정을 기다립니다. '몸만 어른, 무늬만 인간!' 그렇게 딱하고 한심한 소견의 주인공만 아니면 좋겠습니다.


'상벌'도 따라옵니다. 칭찬이든 꾸지람이든 달게 받아야 합니다. 스승들께 한없는 공경과 사랑의 예를 올려야 합니다. 그 어른들 가운데에는, 팔천만 송이의 카네이션을 받아야 할 선생님도 계십니다. 성함은 '이 도(李?)', 만백성의 눈을 뜨게 해주신 분. 스승의 날이 바로 세종대왕 생신 아니던가요.


세종대왕 말이 나온 김에, 의견 하나를 내놓고 싶습니다. '성년의 날(20일)' '부부의 날(21일)'도 우리말로 바꾸면 어떨까요. 앞의 것은 '어른 되는 날', 뒤의 것은 '짝꿍의 날' 또는 '가시버시의 날'. 오월의 날들은 왠지 고유어 명칭이 더욱 살가울 것 같습니다. 경축일, 기념일 다 그렇게 바꿔보고 싶은 생각은 지나친 욕심이겠지요.


성년의 날부터 먼저 고쳐보길 희망합니다. 어른 되는 날. 성년과 미성년의 생물학적 분수령이 아니라 성숙한 인간으로서의 권리와 책무를 다짐하는 날. 자기 안에 선생님을 모시는 날. 모든 성인들 스스로 '어른 됨'의 진도를 살피고 자신을 돌아보는 날로 삼자는 뜻입니다.


자, 선생님들 오십니다. 카네이션을 준비해야겠습니다.


윤제림 시인ㆍ서울예술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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