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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론] '황금돼지'를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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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짜 돼지해가 시작됐습니다. '기해년'은 성급히 빌려다 쓴 이름이었습니다. 우리가 엊그제까지 새해라고 부르던 동해의 태양은 사실, 작년의 해였습니다. TV나 신문이 기해년이 밝았다며 보여준 사진 속의 해는 무술년의 것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한참이나 '돼지꿈'을 '견공(犬公)'에게 빈 셈입니다. 새삼스러운 일도 아닙니다. 이 땅의 새해와 묵은해는 항상 그렇게 자리를 바꿨습니다. 오랜 습관인데, 올해는 다소 거슬립니다. 돼지해에 태어난 저만의 생각일 수도 있고, '3ㆍ1운동 백주년'이 불러온 느낌일 수도 있습니다. 유관순 열사의 만세 소리와 함께 해가 바뀐 까닭일지도 모르지요.


돼지가 1월1일에 도착했다면, '정월 보름'은 벌써 지났습니다. '부처님'은 5월12일에 오셔야 합니다. 추석은 광복절과 같은 날이겠지요. 개와 돼지들에게도 미안한 일입니다. 공연히 싸움을 부추기는 것 같아서 안쓰럽습니다. 다시 연말이 되면 이렇게 떠받드는 돼지를 서둘러 내려놓고, 쥐들에게 갖은 덕담을 해대겠지요.

우리의 세월은 열두 동물의 릴레이. 드디어, 개와 돼지가 바통을 주고받았습니다. 개는 말 없이 달력 밖으로 사라지고, 손을 흔들며 등장한 돼지가 주인공의 미소를 짓습니다. 모여선 관중 모두 그의 맹활약을 기대하는 눈치입니다. 행복과 행운을 부탁한다고 박수를 치며 환호합니다. 개도 돼지도 어리둥절하겠지요. 냉대와 천시의 순간들이 떠오를 것입니다. 딱한 처지와 고약한 인간 앞이면 어디나 끌려 다니던 기억입니다. '개고생' '개 같은' '돼지만도 못한'…. 나라를 팔아먹은 자들의 이름 앞에도 쓰였습니다. "개돼지만도 못한(豚犬不若) 외무대신 박제순을 비롯한….(장지연ㆍ'시일야방성대곡')"


그렇지만, 아무도 개돼지를 미워하진 않습니다. '개 팔자'를 부러워하고, '돼지꿈'을 소망합니다. 이번 설에는 돼지를 바라보는 눈길들이 더욱 그윽했을 것입니다. 황금돼지해니까요. 저 역시, 돼지에게 많은 것을 주문했습니다. 일 년이 무사하고 태평한 날들의 연속이기를, 사계가 순조롭고 평화롭기를 기원했습니다. 기도가 통하려면 돼지에 대한 편견이나 선입견 혹은 고정관념부터 버려야 합니다. 그의 머리에 무릎을 꿇고 절할 때처럼 진실해야 하며, 그가 꿈에 나타나주기를 바라며 잠자리에 들 때처럼 겸허해야 합니다. 돼지의 참모습을 그려야 합니다. 저는 얼마 전에, 제 시를 통해 돼지 가문에 공개 사과를 했습니다.


"학생들에게 인간이란 배역의 어려움을 가르치다가/사람노릇이 얼마나 힘든지를 설명하다가/귀문(貴門)에 막심한 무례를 저질렀습니다// 사람노릇 못하면 돼지나 진배없다/돼지 역할은 얼마나 쉬우냐/먹고 싶으면 먹고/자고 싶으면 자고//(하략)" 그렇게 터무니없는 오해에 대한 용서를 빌었습니다.

먹고 싶으면 먹고, 자고 싶으면 자는 것이 아무나 하는 일이 아님을 몰랐기 때문입니다. 당나라 혜해(慧海)선사가 이렇게 말한 뜻을 깨치지 못한 것입니다. "도(道)란 무엇인가? 배고프면 먹고, 졸리면 자는 것이다.(飢來喫飯 困來卽眠)" 돼지의 일상이야말로 무엇에도 걸림 없이 자기 의지대로 행하는 경지임을 몰랐습니다.


그런 집안이기에 최치원 같은 대학자도 나왔겠지요.(조선 시대 전기소설 '최고운전'에는 최치원이 금돼지의 아들로 그려진다.) 황금돼지 저금통이라도 놓고 기도해야겠습니다. 제가 제 마음의 주인이 되는 해이기를. 청년들의 사정이 많이 나아지고, 돼지띠 복덩이들이 많이 태어나기를. 연례행사처럼, 축산농가와 방역 당국을 긴장시키고 있는 구제역 발생 소식이 조용히 사그라지기를. 올해엔 불쌍하고 억울하게 죽어가는 돼지들이 없기를.


윤제림 시인ㆍ서울예술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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