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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론] 폭로탐사보도중독과 언론산업 퇴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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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핍한 시대의 시인'. 한국의 명저 100선에 들기도 했던 미학자 김우창 교수의 대표적 문학연구서 제목이다. 누가 봐도 1970년대를 짓눌렀던 빈곤함, 궁벽함, 결핍을 연상케 해준다.


이제 2019년 겨울, 서울을 둘러보면 '궁색한 시대의 리더'라고 해야 할 것만 같다. 정치인도 궁색하고 대학 총장도 궁색하고 기업인도 언론인도 죄다 뭔가 그만 속절없이 궁색해졌다.

이 궁색함은 정신의 빈곤이자 아무리 해도 숨길 수 없는 논리와 근거 부족이라는 면에서 물질적 가난과 구차함 정도로만 다가왔던 궁핍보다 훨씬 더 무거워 보인다. 어디 가서나 당당해야 할 언론인이 노상 궁색한 캐릭터로 굳혀져 버린다면 우리 사회와 경제에도 정말 큰 병폐가 아닐 수 없다. 이번 SBS와 JTBC 두 사례를 들어 콕 짚어 봤으면 한다.


SBS가 크게 터뜨린 손혜원 의원 뉴스는 폭로성 탐사보도이다. 별안간 온 국민 손끝을 달구고 있는 손석희 JTBC 앵커 신상 관련 뉴스들 또한 폭로 계열 탐사보도 부류이다. SBS는 폭로성 탐사보도를 통해 특종 성과를 얻어 매체 파워를 강화하고자 하는 목표에 매달린 케이스다. JTBC 리더를 도발한 프리랜서 기자의 활동 또한 개인 지명도를 단박에 높이려 강행한 사례로 읽을 수 있다.

지적할 것은 이들 탐사보도 또는 유사 탐사보도의 파장이 한국 언론 산업 전체를 송두리째 흔들고 있다는 사실이다. 제일 큰 낭패는 탐사보도 중독이 조장한 언론사들 출혈 과당 경쟁이다. 신문이든 지상파든 종편이든 대부분 종사자들은 초무한경쟁 탐정 놀이에 취해만 가고 있다. 한 언론이 유명인 누구를 때리면 다른 경쟁 언론은 곧장 더 큰 거물을 향해 전사적으로 매달려 뼈 때리는 특종 폭로 작업에 뛰어든다.


이렇게 미디어가 저마다 탐사보도 버튼을 눌러대는 통에 시청자는 웬만한 일에는 놀라지도 않는다. B급보다는 A급, A급보다는 트리플 A급 정도는 아주 잘근잘근 헤집어 놔야 눈길 한 번 줄 만한 황제 고객으로 등극한 지 오래다. 국정농단 사건을 목도한 국민 아닌가.

그러다 보니 국정농단 기원 후 3년쯤 되는 현재 시점에서 거의 모든 종류의 탐사보도 언론은 국민들을 더 세게 자극해야만 살아남을 거라는 망상까지 드러내 보인다. 뉴스 소비자들은 또 그들대로 엄청나게 매운 얼얼한 맛에만 집착하게 되었다. 한마디로 마약 저널리즘이다. 뭉텅이 탐사보도라는 항생제가 자초한 내성 결핍과 교란 증상에 다름아니다.


한마디로 마약 저널리즘이다. 뭉텅이 탐사보도라는 항생제가 자초한 내성 결핍과 교란 증상에 다름아니다.


탐사보도 남용이 몰고 온 마약 저널리즘은 곧 양질의 언론 서비스를 쫓아내는 악영향을 끼치게 된다. 독하고 센 마약 저널리즘 쪽으로만 공급도 수요도 극단화되어가는 현 추세를 막지 못한다면 언론의 생명인 공신력은 쓰러지게 마련이다. 특종과 폭로에 안달이 났으되 설익은 밥만 지어 내는 궁색한 언론이 많아질수록 좋은 광고도 좋은 인력도 좋은 후원도 끊길 수밖에 없다. 한국 언론 산업이 단독 특종 과잉과 강박관념으로 내부 붕괴되느냐 마냐 하는 변곡점에 오르게 되었다 우리는.


파생된 이상 징후가 또 있다. 탐사보도 극한 경쟁이 심해질수록 인 하우스 내부 시스템을 벗어난 특종 암시장 거래가 횡행하게 된다. 자사 인력과 자원이 빠듯한 언론을 홀리는 고리대금업 사금용 지하경제가 마수를 내미는 동시에 언론 동네마저 자정 기능을 상실하면 전체 생태계는 그 길로 끝장이다.


많이 보던 그림이 있다. 프리 에이전트 기자가 특종 활동과 거래에 목숨을 걸고 결국에는 뉴욕 암흑가 범죄 조직과도 연루된 위험한 상황에 내몰리는 생생한 장면이 명배우 조 페시가 열연한 걸작 영화 'The Public Eye, 1992'에 잘 묘사되어있다.


우리가 모르는 사이 탐사보도시장이 과열된 나머지 온갖 기획과 조작, 검은 거래와 무례, 악행이 언론계 모세혈관까지 타고 흐른 것이라면 그런 몸체는 회생 불능이다. 좋은 탐사보도는 셜록 홈스 만큼이나 멋지겠지만 가짜 탐사보도는 그냥 파파라치에 불과하다. 정파나 실리 이해관계 음모와 각본에 따라 만들어낸 마약 저널리즘에 취한 언론 공급자나 수요자가 주거니 받거니 짬짜미하는 구조에 탐닉했다면 그건 이미 언론도 아니다.


마약저널리즘이 비벼댈 나쁜 언론 신디케이션을 해체해야만 언론산업을 다시 세울 수 있다. 그래야만 이 땅의 가장 용기 있고 명석한 청년들이 언론사로 모이게 할 수 있다.


언론인 백상 장기영 소신을 인용하고 싶다. 불편부당(不偏不黨). 어느 한 쪽으로 기울어짐 없는 공평함만이 지금 궁색해질 대로 궁색해진 언론산업을 일으켜 세울 수 있다. 사익에 기울거나 정파에 끌리지 않고 특종 복권에 맘 뺏기지 않는 불편부당함만을 마주하고 싶다.


심상민 성신여대 미디어커뮤니케이션학과 교수 ㆍ 한국문화경제학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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