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정신, 그대 가볍게 움직여, 물결 속에 황홀한 익숙한 수영자처럼, 그윽한 무한을 즐겁게 주름잡는다, 말 못할 씩씩한 쾌락에 취해. (…)안개 낀 삶을 무겁게 짓누르는 권태와 망망한 비애에 등을 돌리고, 빛나는 맑은 들 향해 힘찬 날개로 날아갈 수 있는 몸은 행복도 하다! 그의 생각은, (…) 하늘 향해 자유로이 날아오르고, 인생 위를 떠돌며, 쉽사리 알아낸다, 꽃들과 말 없는 것들의 말을!”
그로부터 40년 지난 몽파르나스 공원묘지. 파리에 와서 제 첫 발길 닿은 곳이 여기입니다. 안내판에 알파벳순으로 번호가 있네요. 보들레르는 14번. 입구 오른편 담장 끝까지 가서 왼쪽으로 꺾어 조금만 가면 보입니다. 묘비에는 의붓아버지 오피크와 어머니의 이름이 함께 새겨져 있습니다. 의붓아버지를 싫어했지만 함께 묻힌 거죠. 아들 먼저 저승에 보낸 어머니의 결정입니다.
딸아이 목소리로 녹음된 <상승>의 프랑스어 음원을 틀어놓고 묘에 경배합니다. 애송시를 자녀나 제자에게 가르쳐 시의 주인공 앞에서 낭송하게 하기. 시를 사랑하는 독자가 시인을 위한 헌정을 꿈꾼다면, 이런 게 괜찮지 않을까 싶습니다. 어디 시만 그러겠습니까. 진정한 애호는 후대에 전해서 함께 나누는 게 ‘문화가 있는 나라’의 향기 아니겠는지요. 빵 하나를 나누면 자기 몫이 줄어들지만, 감동을 나누면 전체의 몫이 커지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시는 말을 짧게 합니다. 많은 말과 긴 글은 지식을 자랑할 수 있지만 침묵이나 짧은 말 속엔 자연의 지혜가 감추어져 있죠. 바람과 구름, 시냇물과 풀잎의 말을 알아듣는 교육을 우리는 하지 않습니다. 예전에는 그것이 자연교육이었고, 샤먼들에 의해서 구전되어 왔지요. 바이칼 호수의 아침은 ‘내 젊은 어머니 아침’이고, 아메리카 인디언 선주민들의 이름은 ‘늑대와 함께 춤을’이나 ‘주먹 쥐고 일어서’ 등이었습니다. 헤밍웨이의 <노인과 바다>를 주의 깊게 보면 그토록 말없는 노인이 바다에 나가 거대한 청새치를 잡는 동안 대자연과 끊임없이 대화하는 대목이 나옵니다. 그는 자연의 진정한 일원이었던 겁니다.
우리가 우리 아이들에게 시를 가르치는 것은 수능시험 평가를 위해서가 아닙니다. 생명을 사랑하고 공감하는 태도를 길러주기 위해서죠. 좋은 시는 사람의 공감능력을 길러줍니다. 공감능력이 생기면 슬기구멍이 열리고, 슬기구멍이 열리면 심금이 울리지요. 그렇게 울리는 심금은 고래의 노래처럼 먼 바다를 다 울릴 테지요. 하늘인들 어찌 화답하지 않겠습니까. 함께 아파하고 함께 기뻐하는 삶을 원한다면 이보다 중요한 기초과목이 있을까요?
심금(心琴). 마음의 거문고 한 채 둘러메고 떠도는 나그네 있다면, 그는 모든 생명들과 교감하는 다정한 공감인(共感人) 아니겠는지요. 열일곱 소년에게 공감의 매혹을 가르쳐준 프랑스 시인 보들레르. 40년 만에 파리의 나그네 되어 찾아온 몽파르나스 공원묘지 오후 5시 55분. 폐문을 알리는 종이 울립니다. ‘엘레바시옹…’ 묘비의 돌 표면을 울리는 낭송 소리도 하늘로 아스라이 올라갑니다.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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