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후 한 詩]번짐과 스밈/허형만
유치원 앞을 꺾어 돌 때
아직 아이들이 등원하기에는 이른 시각
보랏빛 나팔꽃이 먼저 도착했습니다.
아이들이 깔깔깔 유치원에 들어서면
나팔꽃은 환한 얼굴로 반길 것입니다.
조금 뒤에 도착해 문 앞에 서 계시던 하느님도
아이들과 나팔꽃을 배경으로 셀프카메라를 찍으시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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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지는 것과 스미는 것은 이렇게 차이가 없을 겁니다.
■한국어 사전을 찾아보면 '번지다'는 '차차 넓게 젖어 퍼지다' 혹은 '점차 넓게 옮아가다'라는 뜻이고, '스미다'는 '배어들다', '흘러들다' 또는 '마음속 깊이 느껴지다'라는 의미다. 무척 가까워 보이는 이 두 단어들 간의 차이점을 굳이 찾자면, '번지다'가 '확산-넓이'의 맥락을 지닌다면 '스미다'는 '침투-깊이'의 문맥을 형성한다는 것이다. 시인이 이를 몰랐을 리는 없을 것이다. 그런데 왜 "차이가 없을 겁니다"라고 썼을까? 그 까닭은 시를 읽어 보면 금방 직감할 수 있다. '나팔꽃-아이들-하느님' 사이의 감응, 요즘 자주 쓰는 말을 사용하자면 정동(affect)은 넓이와 깊이를 함께 요청한다. 번지는 것이 곧 스미는 것이고 스미는 것이 곧 번지는 것이라는 말이 아니라, "번지는 것과 스미는 것"은 동시적 사태이라는 것이다. 채상우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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