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업지배구조 대해부]'프리패스' 이사회…1743건 중 8건만 제동
[아시아경제 박철응 기자]지배구조는 기업의 의사결정체계라고 할 수 있다. 보다 합리적이고 투명한 결정을 내릴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지배구조 개선의 핵심이다. 한국 기업들은 IT를 필두로 눈부신 성장을 거듭해 왔지만 지배구조 문제가 발목을 잡아왔다는 점을 부인하기 어렵다. 오너의 독단이나 일탈로 인한 불확실성이 잠복돼 있다는 게 한국 기업을 바라보는 해외의 시각이기도 하다.
문재인 정부 출범 이후 지배구조는 경제계의 주된 화두로 떠올랐다. 기관 투자자들이 적극적으로 의결권 행사에 나서도록 하는 ‘스튜어드십 코드’는 변화의 마중물이 될 것으로 보인다. 기업 스스로 변하지 않으면, 외부의 힘에 의해 변화될 수밖에 없는 상황에 처할 수 있다. 아시아경제 기획취재팀은 5회에 걸쳐 100대 기업 이사회 분석 등을 통해 지배구조 실태를 짚어보고 개선방향을 모색해 보고자 한다.
올해 국내 100대 기업들의 이사회에 상정된 1700여건의 안건 중 부결이나 보류된 경우는 단 8건(0.45%)에 불과했던 것으로 나타났다. 대규모 투자나 계약 등 회사의 중요 결정 사항들이다.
이사회의 사외이사 비중이 절반을 넘어서지만 사실상 형식적인 통과 의례로 비쳐진다. 사전 조율 과정을 감안하더라도 99.55%의 찬성률은 납득하기 쉽지 않다. ‘거수기 이사회’라는 비판의 실증적 근거가 되는 셈이다.
이사회가 독립성을 갖춰 경영감시 기능을 얼마나 적극적으로 수행하는지 여부는 최근 경제계의 최고 화두인 기업지배구조 개선의 핵심이다.
아시아경제 기획취재팀은 시가총액을 기준으로 100대 기업을 선정하고 금융감독원 전자공시시스템에 등재된 각 기업들의 반기보고서를 통해 이사회와 이사회 내 각종 위원회 안건들을 전수조사했다. 반기보고서이지만 대부분 8월에 공시됐기 때문에 7~8월에 열린 이사회도 일부 포함됐다.
보고가 아닌 의결을 목적으로 한 안건은 모두 1743건이었는데, 단 한 명의 사외이사도 반대 의견을 제시하지 않고 ‘찬성’으로만 일관한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불참’도 적지 않았다. 각 회사들은 상법에 근거해 주주총회 소집, 대표이사 선임 및 해임, 대차대조표와 손익계산서 승인, 신주나 사채 발행, 배당 등과 경영상 주요 결정을 이사회 의결사항으로 두고 있다.
반대나 보류·유보는 8건이었다. 100대 기업만 놓고 보면 이사회에 오른 안건이 통과되지 못할 확률은 0.45%에 불과한 셈이다.
그것도 부실에서 벗어나기 위해 자구책을 펴고 있는 대우조선해양의 이사회에서 나온 ‘다른’ 의견들이 다수를 차지한다. 45건의 안건 중 3건이 유보, 3건은 조건부 가결됐다.
예를 들어 대우조선해양 이사회는 지난 1월 ‘DMHI 제작자금 대여금 만기일 변경 승인의 건’을 상정했으나 김유식, 정원종, 조전혁, 이영배 등 4명의 사외이사가 모두 ‘유보’ 의견을 냈다. 그 다음달 열린 이사회에서 같은 안건에 대해 1명의 사외이사가 불참하고 3명이 ‘조건부 찬성’ 의견을 내면서 통과됐다. DMHI는 루마니아에 소재하고 있는 대우조선해양의 자회사로 매각 추진 중이다.
회사가 생존의 기로에 서 있다 보니 매각 추진 중인 자회사에 대한 자금 관리를 보다 철저히 하려는 의도였던 것으로 풀이된다.
BNK금융지주는 지난 6월9일 이사회에서 ‘주요 업무 집행 책임자 임면안’에 대해 5명의 사외이사가 모두 반대 의견을 내서 부결됐다. 같은 달 22일 열린 이사회에 상정된 ‘최고경영자 경영승계 절차 개시 사유 해당 여부’ 역시 사외이사들이 모두 ‘보류’ 의견을 냈다. 성세환 BNK금융지주 회장이 주가 조작 혐의로 구속되는 위기 상황에서 사외이사들이 목소리를 낸 것이다.
대우건설의 경우 지난 8월 열린 이사회에서 ‘퇴직임원 처우에 관한 규정 개정의 건’에 대해 참석 사외이사 3명 중 1명은 반대, 2명은 보류 의견을 내 보류됐다.
‘퇴직임원 관리역, 상담역, 자회사 대표 위촉 유지 여부 심의의 건’ 역시 같은 3명의 사외이사들이 모두 보류 의견을 제시했다. “경영성과 평가에 대한 냉철한 성찰이 선행된 후 이사회에서 논이하는 것이 타당”(우주하), “손실에 대한 명확한 책임 규명 후 이사회에서 판단하는 것이 합리적”(윤광림), “관련 규정을 개정 후 적용함에 있어 다방면의 검토가 필요”(최구윤) 등 이유에서였다.
GS리테일의 경우 지난 3월2일 이사회에서 ‘미래에셋펀드 투자 승인의 건’에 대해 4명의 사외이사가 모두 ‘재심의’ 의견을 내서 보류됐다. GS리테일은 이로부터 나흘 후 다시 이사회를 열어 이 안건만을 상정한 끝에 가결시켰다. 4명의 사외이사 중 1명은 불참했고 3명이 찬성했다.
100대 기업의 평균 이사 수는 7.4명이며 이 중 4.2명이 사외이사다. 자산 2조원 이상 상장사는 사외이사 비중을 과반으로 하도록 하는 상법상 기준이 반영된 것이다. 미국의 대형 종목 시세를 반영하는 S&P500지수 기업들의 평균 이사 수가 11명인 것에 비하면 규모가 작은 편이다. 미국 중소형주 지수인 Russell 2000 기업들의 평균 8명보다도 작다.
일반 기업보다 더 높은 수준의 법적 규제를 받는 금융회사들의 사외이사 비중이 상대적으로 높았다. 신한지주의 경우 12명 중 10명이 사외이사여서 83%로 가장 높은 비중을 보인다. KB금융은 정관상 이사를 30명까지 둘 수 있도록 하고 있다. 실제로는 9명이며 이 중 7명(78%)이 사외이사다. 하나금융지주는 11명 중 8명(73%)이다. 이들 금융사들은 사외이사가 이사회 의장을 맡고 있어 독립성 면에서 비교적 높은 수준을 갖추고 있다. 일반 기업들은 대부분 경영진이 이사회 의장을 겸직하고 있다. 미국의 경우 절반 정도만 최고경영자가 이사회 의장까지 맡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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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총 상위 대기업들은 삼성전자가 9명 중 5명이 사외이사인 것처럼 과반 요건만 맞추고 있다. 상대적으로 규모가 작은 기업들 중에서는 한미사이언스, 동서, 메디톡스, 오뚜기, 녹십자 등이 4명 중 1명만 사외이사로 구성돼 있다. 특히 동서는 1명의 사외이사마저 김용언 전 동서식품 회장이다.
대부분 기업들이 이사회 내에 사외이사후보추천위원회를 두고 있었으나 이 역시 경영진이 위원장을 맡는 경우가 많았다. 총수 일가의 사익 편취를 방지할 수 있는 내부거래위원회를 운영하는 기업은 31개였다. 현대차그룹 계열사인 현대차와 현대모비스, 현대글로비스, 기아차와 SK이노베이션 등 5개사는 투명경영위원회도 두고 있다. 하지만 이사회 내 각종 위원회에 상정된 안건 중 부결이나 보류가 나온 경우는 한 건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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