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르노 논쟁]①새 지평 연 '플레이보이'와 휴 헤프너
'섹스에 대한 위선적 생각 바꿀 것'…1950년대 성 개방 풍조 힘입어 미디어 재벌로 거듭나
휴 헤프너는 킨제이 보고서 발표 이후 성 개방 풍조가 확산된 1950년대 미국의 포르노그래피 산업을 '플레이보이'를 통해 급속도로 확장·발전시킨 주역이었다. 그래픽 = 이진경 디자이너
[아시아경제 김희윤 기자] “나는 섹스에 대한 해롭고 위선적 생각을 바꾼 데 일조한 사람으로 기억되고 싶다.” 이렇게 말한 ‘플레이보이’ 창립자 휴 헤프너가 91세를 일기로 27일(현지시간) 사망했다.
보수적 감리교도 집안의 장남이자 IQ 152의 천재로 기대를 한 몸에 받았던 그는 미 육군 신문 기자로 언론계에 첫발을 내딛은 뒤 카피 에디터를 거쳐 플레이보이를 창간했다. 그가 창간한 ‘플레이보이’는 성인잡지계에선 최상의 인지도를 갖고 있다.
플레이보이가 포르노 잡지라는 인식은 오해다. 경쟁지로 거론되는 ‘펜트하우스’와 ‘허슬러’의 경우 각각 소프트 포르노와 하드코어 매거진에 가깝지만 플레이보이의 화보는 기껏해야 헤어노출 누드가 최고 수위인 '소프트 콘셉트'를 유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이들 중 플레이보이가 가장 성공한 매거진이 될 수 있었던 배경은 무엇이었을까?
격이 다른 누드, 수준급 단편소설도 실어
플레이보이의 성공 배경은 휴 헤프너의 혁신적 안목에 있었다. 플레이보이 이전에도 누드사진은 있었고, 성인잡지도 존재했지만 그는 은밀한 ‘판타지’를 자극할 줄 알았다.
누가 봐도 손쉽게 돈을 주면 벗을 것 같은 직업여성이나 누드모델이 아닌, 일상에서 마주할 것 같은 예쁜 여성, 학교 선배나 교회 누나 같은 ‘걸 넥스트 도어’를 메인 콘셉트로 모델 선정에도 까다로운 기준을 적용했다. 촬영한 화보는 남성의 은밀한 판타지를 정확하게 공략해 성공을 거뒀다.
미군 신문 기자를 거쳐 에스콰이어지 카피 에디터를 지낸 휴 헤프너의 감식안은 수준 높은 기사에도 적용됐다. 플레이보이는 ‘품격’있는 기사와 단편소설을 과감하게 실었다. 어슐러 르 귄, 커트 보네거트, 아서 클라크와 스티븐 킹의 작품이 실리며 하나의 앤솔로지를 구성했는가 하면, 스티브 잡스나 마틴 루터 킹 같은 사회 저명인사의 독점인터뷰를 게재하기도 했다.
특히 피델 카스트로의 인터뷰는 매카시즘 광풍이 불어 닥친 미국 사회 분위기를 넘어 쿠바혁명 이후 미국 내 최초 인터뷰였고, 1990년 이뤄진 도널드 트럼프의 심도 깊은 인터뷰는 그의 대통령 당선 후 각국 정상의 대미 외교 교재로 읽힐 정도였다.
펜트하우스 vs 허슬러 vs 플레이보이
휴 헤프너가 1953년 플레이보이를 발간해 선풍적 인기를 끌자 영국에서 그가 구사한 전략을 그대로 답습한 매거진 ‘펜트하우스’가 창간됐다. 보다 노골적 섹스 판타지에 포커스를 맞춘 이 잡지는 1969년 미국에 상륙해 원조 격인 플레이보이의 강력한 경쟁지로 세를 확장했다.
초기에는 플레이보이와 비슷한 수준의 소프트 콘셉트를 지향했던 펜트하우스는 점차 경쟁이 심화되자 노출 수위를 올려 화제를 모은 바 있다. 이에 반해 ‘허슬러’는 시작부터 이들과 궤를 달리했다. 1974년 미국 켄터키주에서 스트립바를 경영하던 래리 플린트는 바 홍보를 위한 뉴스레터를 만들다 이를 발전시켜 ‘허슬러’를 창간했다.
표현 수위와 대상에 있어 허슬러에 성역은 없었다. 하드코어 콘셉트의 성교사진, 노골적 정사신과 포르노 배우가 집단으로 등장한 그룹섹스, 근친상간 등 노골적 성 묘사에 한때는 300만부를 발행할 만큼 큰 반향을 일으켰다. 1975년 8월엔 케네디 대통령의 미망인이자 그리스 선박왕 오나시스와 재혼한 재클린 오나시스의 누드사진을 게재하기도 했다.
1948년 킨제이 보고서가 발표된 후 성에 있어 개방적 풍조가 생겨난 이래 2차 세계대전과 베트남전쟁은 미국 내 반전운동과 허무주의를 만연케 했고, 성과 쾌락의 탐닉에 대한 도덕적 절제심을 일거에 희석시키며 다양한 포르노 매거진을 태동시켰다. 휴 헤프너의 죽음과 플레이보이에서 사라졌던 누드는 시대와 산업변화에 따른 포르노 매거진에 대한 종언으로 읽힌다.
<ⓒ투자가를 위한 경제콘텐츠 플랫폼, 아시아경제(www.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