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후 한 詩]오후 네 시/김선재
없는 것을 그리워하는 것이 우리의 오랜 병이었다
그림자 위에 그림자가 눕고
긴 햇빛이 눈을 가려 서로가 지워질 때,
안과 밖이
등을 대고 등을 켠다
낮아지는 발들, 데일 것처럼 붉은
숲은 부풀고,
노래는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내가 당신, 하고 부르면
아무도 보이지 않고
보이지 않아 들리지 않는 사람들
안이 어두워질수록 우리는 멀어졌다.
흔들리는 벽
쏟아진 서랍
갈피 없는 책
그러나, 사라진 것을 그리는 것이 내 오랜 버릇이었다
그림자가 내내 꽃밭을 쓰다듬고 있다
눈꺼풀이 흔들리는 눈동자를 감추듯이
뒤꿈치가 다가오는 발소리를 숨기듯이
밖이 깊어질수록 우리는 흐려져
낮아지는 바람,
붉은 그림자는 얼굴을 씻고
유리창은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문 앞에 엎드린 개가 지나간 길들을 오래 핥고 있다
■오후 네 시는 그런 시간. 하루가 다 지나간 건 아니지만 하루가 사라지고 있는 시간. 내일은 아직 짐작하기 어려운 시간. 그래서인지도 몰라. "없는 것을" 자꾸 그리워하게 되는 시간. 꼭 그만큼씩 맨드라미가 불타오르는 시간. "긴 햇빛이 눈을 가려 서로가 지워"지는 시간. 괜스레 누군가가 생각나 "당신, 하고 부르면" 거기엔 "아무도 보이지 않고" "보이지 않아 들리지 않는 사람들"만 "흔들리는 벽"처럼, "쏟아진 서랍"처럼, "갈피 없는 책"처럼 가득한 시간. "그림자 위에 그림자가 눕고" "내 오랜 버릇"인 듯 "사라진 것을 그리는" 시간. 아직 날은 저물지 않았지만 이미 모든 것이 소멸하기 시작한 시간. 채상우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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