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후 한 詩] 저기요/김병호
겨울과 새벽 사이를
쉼 없이, 눈이 내린다
얼마나 내렸을까
마당으로 나서니
밤새 혼자 지킨 집에
낯선 발자국 하나
나간 걸음인지
들어온 걸음인지
하얀 이빨 자국 같다
두려운 생각도 없이
안타까운 마음도 없이
자국 안에
가만, 발을 넣는다
먼 구름까지 번지는
잠 깨지 않은 숨소리
흰 입술들 내려와
깨문 발자국
주인은 어디 가고
밑동만 남았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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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장 소리만 덜컹거린다
■한여름 밤에 눈 내리는 겨울 새벽에 대해 쓴 시를 만났다. "겨울과 새벽 사이를" "쉼 없이, 눈이 내린다"니! 도저한 고요다. 훔치고 싶어도 훔칠 수 없는 깊이다. 이 한 연만으로도 이미 시를 이루었다고 말할 수 있을 텐데, 시인은 "낯선 발자국 하나"를 더 얹는다. "나간 걸음인지" "들어온 걸음인지"는 모르겠지만 "하얀 이빨 자국 같"은 발자국. 그래 그 발자국 "안에" "발을 넣는" 일은 오로지 "가만"이어야 마땅했을 것이고, 두려움도 안타까움도 감히 그 끌림을 가로막을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눈 위에 난 발자국에 발을 겹치자 "먼 구름까지 번지는" "잠 깨지 않은 숨소리"라니. 이 엄청난 고요를 무엇이라 말할 수 있을까. 여름밤의 매미 소리들마저 차라리 적요인 듯했다. 채상우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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