떠돌며 머흘며 미당의 방랑기, 체험이 곧 詩다
윤재웅 동국대학교 교수의 시인 서정주 다시 보기
미당 서정주의 '방랑기'가 새로 나왔다. 전 20권 기획의 '미당 서정주 전집'(은행나무) 14,15권이다. 1977년 11월 28일부터 약 9개 월 간에 걸친 세계 여행 기록이 토대가 됐다. 시인이 세계를 '떠돌며 머흘며' 연재기를 쓴다는 게 당시로는 첫 사례였다. 그 뒤 1984년의 제2차 세계여행, 1990년대의 여행들을 합해 그의 모든 세계 방랑 기록을 묶은 게 이번 책이다. 1938년, 스물세 살에 쓴 그의 명시 '바다'에 나오는 "아라스카로 가라! 아라비아로 가라! 아메리카로 가라! 아프리카로 가라!" 구절처럼, 5대양 6대주에 걸친 세계의 여러 지역들을 두루 살피고 그곳에서 발견한 '위대한 자연'의 가치를 유려한 필치로 소개하고 있다.
요즘이야 해외여행에 제한이 없지만 당시 이 방랑기는 우리사회의 특별한 문화 이벤트였다. 몸으로 직접 체험하지 못하는 세계의 모습을 '시인의 글'이 대신해 주었던 것이다. 더구나 미당 방랑기는 세계의 풍물들에 대한 시지각적 표현이 아니라 몸의 모든 감각을 활용한 통감각적 표현이라는 점에서 각별했다. 대부분의 여행기는 '풍경과의 만남'이다. 그리고 그 풍경의 탄생 배후에는 시각이 강하게 작동하고, 그것이 또한 인간의 이성 발달과 관계가 깊다는 게 일본의 비평가 가라타니 고진의 주장이기도 하다.
하지만 미당의 방랑기는 눈에 보이는 것들만이 위주가 아니라 다양한 감각들이 고루 등장한다. 브라질의 산투스에서는 아예 온몸을 던져 바닷가에 잠긴다. "이 아름다운 자연에 살을 한번 대 보려고"가 그 이유다. "옛날 도인들이 물속에 뛰어들어 자연에 직접 살을 대 보지 않고도, 소나무 밑에서 선선한 바람을 쏘이거나, 먼 산천을 고운 미소로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자연과의 원만한 교섭을 늘 하고 지냈던" 것을 참을 수 없었다는 것. 이때가 1978년 3월 27일, 시인은 정년퇴임 직전의 64세 노인이었다. 이른바 '온몸체험'은 미당 방랑기 전체를 관통하는 핵심어다.
인도와 네팔의 불교유적과 유물들을 보고나서는 '통각된 정신으로 직관오달하는 인식의 길을' 각성하게 된다. 감각과 지각의 통합 방법론이니, 이는 이성 위주의 플라톤주의 즉 서양문명비판론의 요체이기도 하다. 미당이 세계 방랑을 통해 탐구하고자 했던 것은 결국 자신의 온몸의 감각과 지혜를 동원하여 세계 여러 나라 사람들이 겪는 '심층 생의 매력의 간절함'이었으며 이 간절함은 '모든 인류가 신의 존엄한 경지에 가까이 가는' 것이었다.
어떻게 하면 이렇게 되는가. 세계를 떠돌다 온 한국의 시인은 '위대한 자연에 동화할 때'라고 단언한다. 인간사의 희로애락이며 민족과 종족 전체의 어떤 비극적 상황도 '개인과 전통의 심층'을 통해 자연에 동화하기만 한다면 그것이 곧 범인류적 이상이라고 본 것이다.
한국을 대표하는 당대 최고의 시인이 실제의 방랑 체험을 통해 지구촌 전체의 문제를 진단하고 소개한다는 것은 한국문학의 영역이 '동서문명비평'의 형식을 통해 세계화 된 최초의 경우라 할 수 있겠다. 1차 여행 때 미처 다 보지 못한 곳들을 팔순 나이에 이르기까지 돌아보고 나서 추가 방랑기를 완성했을 때는 이런 심경도 펼치고 있다. 첫 방랑기 '떠돌며 머흘며 무엇을 보려느뇨'(1980)에 이어 간행된 '미당의 세계 방랑기'(1994) 서문이다.
"여기 내가 지금까지 오랫동안 헤매고 다닌 이 지구 위의 방랑의 기록들을 모조리 모아 세 권의 '세계 방랑기'를 내놓게 되니 후련한 느낌이 든다. 과시해서 자랑하려는 것이 아니라, 5대양 6대주에 걸친 한 사람의 이만큼 한 광범위한 여행도 내가 알기로는 세계문학사? 아니 세계문화사상에서 처음일 듯하니, 이것만큼은 떳떳한 한 보람으로 느낀다."
그런 것이다. 수많은 세계 여행기들이 범람하고 있는 이즈음, 미당의 방랑기가 특별한 이유는 '세계문화사상의 한 사람의 광범위한 최초의 여행기'인 것이며, 세계의 구석구석, 한 사람 한 사람 인류의 문제를 신의 존엄과 위대한 자연의 문제와 연관시켜 탐구하고 있다는 점이다.
동양 고전에 대한 해박한 지식, 서양의 고전문학들과 음악 미술 건축에 대한 조예, 흥미진진한 신화와 격동의 역사들이 잘 짜인 옷감처럼 교직되어 우리 독자들이 일찍이 경험해보지 못한 '세계의 문화사'를 소개하고 있다는 점 또한 미당 방랑기의 특징이다. 고급하고 풍성하고 세련된 인문콘텐츠라는 뜻이다. 시인 서정주의 문학 지평은 왜 이렇게 확장되었는가?
1972년 일지사에서 '서정주 문학전집'이 간행된다. 생존 한국문인 최초로 간행된 전집이다. 일종의 한 매듭이었던 셈. 이후 서정주는 새로운 창작에 도전하게 되는데 그 하나가 다양한 양식의 산문 창작이고, 다른 하나는 세계 전역으로 문학지평을 확장하는 것이었다. 그가 전집 간행 이후 소설과 희곡을 썼다는 점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마찬가지로 세계 전역을 누비며 방랑기를 쓰고, 한편으론 시집 '서으로 가는 달처럼…'(1980)과 '산시'(1991)를 출간함으로써 한국문학의 영토를 지구촌 전역으로 확장했다는 점 역시 그 의미가 제대로 평가되지 않고 있다.
이번 '방랑기' 출간과 함께 선보인 '옛이야기'(16,17권) 역시 중요한 저작이다. 민음사에서 간행된 '서정주 세계민화집'(전5권, 1991)과 '우리나라 신선 선녀 이야기'(전5권, 1993)를 다시 묶은 것이다. 재미있고 교훈적인 이야기가 어디 우리나라에만 있겠는가. 세계를 떠돌며 관심을 가지게 된 그 나라의 독특한 이야기들을 수집하여 창의적으로 각색한 것이 전자요, 우리나라의 신선 선녀 관련 설화들을 모아 여기에 짝을 맞춘 게 후자다. 세계문학의 보편성, 한국문학의 특수성을 함께 형상화한 것이다. 어린이들을 위한 동화의 성격이 짙지만 가족이 함께 읽어도 무방하다. 이런 동화-산문들은 시인 서정주의 문학적 관심이 그만큼 풍성하고 다채롭다는 걸 입증한다.
시인은 무엇으로 사는가? 예민한 감수성, 풍부한 상상력, 형이상학적 성찰, 불면의 밤과 창의적인 표현의 고투…, 그러나 이보다 중요한 게 체험이라는 걸 이번 저작들을 읽으면 헤아릴 수 있다. 한 나라의 대문호가 되는 길 역시 삶의 풍부한 체험에서 비롯되며, 세계인의 슬픔과 환희를 공감하는 데서 이루어진다는 걸 실감하게 된다. 윤재웅 동국대학교 교수
<미당 서정주 전집 14~17/서정주 지음/은행나무/각권 2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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