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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며 생각하며] 16세대의 탄생과 무릎 꿇은 체육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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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11월12일. 백만이 넘는 백성이 광장에 모였다. ‘샤먼 퀸’을 끌어내려는 시민들의 절제된 분노가 들불처럼 번져 폭죽처럼 터졌다. 대통령 하야라는 비장한 구호로 시작했지만 결국 연대와 희망의 축제가 되었다. 바닥깔개를 나누고 촛불을 옮겨 붙이면서 생면부지의 이웃과 함께 연대했다. 민중가요가 익숙지 않았던 어린 학생들은 애국가를 목이 쉬도록 불렀다. 한 손으로 엄마 손을 잡고 다른 한 손에 촛불을 든 꼬마들의 눈망울이 반짝였다.

20140416이 대한민국 역사에 영원히 새겨질 아픔과 고통을 상징하는 여덟 숫자라면 20161112는 시민이 주인인 시대를 여는 비밀번호 여덟 자리다. '68세대', '87세대'라고 불렸던 역사적 주체들은 이제 '16세대'라는 새로운 시민 민주주의의 실체를 만났다. 이날 광장을 가득 메웠던 백만이 넘는 시민들의 몸에는 지워지지 않을 벅찬 연대의 기억이 새겨졌다.

크게 분노하되 결정적인 순간에 현명하게 절제하는 시민들의 모습에서 오랫동안 갈고 닦은 기량을 결정적인 순간에 마음껏 발휘하는 운동선수의 수월성(excellence)을 엿본다. 고대 올림픽에서 최고의 기량을 펼친 이에게 올리브를 엮어 머리에 씌워 준 이유가 바로 그 수월성을 달성해 신의 영역에 가장 가까이 도달한 인간의 덕(virtue)을 칭송하는 데에 있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고된 연습과 단련을 통해 얻은 탁월성을 아레떼(arete)라고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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탁월성에 도달하기까지 운동선수는 수많은 실패를 경험하면서 인고의 땀을 흘린다. 마찬가지로 20161112에서 보여준 민중집회의 아레떼가 발현되기까지 많은 이들이 실패를 경험하고 고귀한 피땀을 흘렸다. 한진중공업 크레인에 올라 309일 동안 고공투쟁을 이어간 김진숙, 쌍용자동차 공장 건너편 송전탑에 올라 171일 동안 싸운 문기주와 한상균은 오늘 우리가 목격한 민중시위의 평화적 수월성을 가능케 한 거룩한 거름과도 같다.

이른바 16세대가 보여준 현명함과 절제는 어쩌다 우연히 발현된 덕이 아니다. 대추리, 기륭전자, 쌍용자동차, 밀양, 콜트콜텍, 대우조선, 강정, 그리고 세월호와 백남기 농민까지. 보이지 않는 곳에서 싸워 온 이들이 힘들게 쌓아온 덕의 발현이다. 오늘 밤에도 광화문 이순신 동상 앞에서 텐트를 치고 한뎃잠을 자는 문화예술인들이 있기에 민중의 저항과 연대는 탁월한 성숙을 이룰 수 있었다.

대학에서 스포츠심리학을 가르치고 운동선수의 수월성을 기르는 일을 업으로 삼는 나에게 금번 최순실의 스포츠농단사태는 더욱 뼈아프다. 내가 사랑했던 스포츠가 저열한 권력자들의 노리갯감으로 때론 먹잇감으로 전락했기 때문이다. 함량 미달의 승마 국가대표 선수 정유라의 체육특기자 입시비리, 재벌의 팔을 비틀어 돈을 끌어 모아 스포츠의 위해 쓰겠다던 K스포츠재단, 최순실의 조카 장시호에게 놀아난 동계스포츠영재센터와 평창동계올림픽 이권을 둘러싼 음습한 시도들이 줄줄이 밝혀졌다.

더욱이 이러한 협잡에 공모하고 부역한 사람들 또한 상당수 체육인들이었다. 전 펜싱국가대표 고영태, 전 승마국가대표 장시호, 그리고 한양대에서 스포츠마케팅 교수로 재직했던 김종 전 차관까지. 체육인의 한 사람으로서 느끼는 모멸감과 자괴감이 너무나도 크다. 짐작컨대 지난 주 한 일간지에서 밝힌 스포츠평론가 정윤수 선생의 심정도 그러했을 것이다. 그의 칼럼은 이렇게 시작했다. ‘이러려고 스포츠를 그토록 사랑했나 자괴감이 들고 괴로운 나날이었다.’
그동안 체육인들이 땀 흘려 얻은 수월성, 그리고 아레떼는 다 어디로 증발했단 말인가? 어쩌면 체육계에서는 그동안 우리 사회가 보편적으로 쌓아온 민주화의 거름이 부재했다는 반증일 수 있다. 성숙한 시민저항의 현현을 16세대를 통해 목도한 오늘 우리 체육인들은 머리를 풀고 가슴을 치며 무릎을 꿇어야 한다. 통렬한 자기반성이 갱생의 첫걸음인 까닭이다.

정용철 서강대 교육대학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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