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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감현장]초등생도 집회 연사로…다시 '정치 과잉의 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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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경제 오상도 기자] #.1 "다음 주가 시험인데 오죽하면 이러겠습니까. 열받아서 나왔습니다." 중학교 2학년이라고 소개한 두 명의 여중생이 연단에 올라 목청을 높였다. 교복 차림에 앳된 얼굴의 여학생들은 금새 쓰러질 듯한 2층 높이의 철골 가설무대에 몸을 의지해 위태롭게 말을 이어갔다.

"어떻게 이 나라에서 취업하고 먹고 살겠습니까. 초등학교 4학년 동생이 '순실이, 순실이'하고 부릅니다. 부끄럽습니다. 구호 한 번 외치겠습니다. '박근혜는 하야하라!'"
여중생들에 앞서 연단에 오른 초등생도 또랑또랑한 목소리로 "대통령 하야"를 외쳤다. 사회자는 "일부 종편 보도와 달리 동원된 학생들이 아니다. 힘찬 박수를 부탁드린다"고 했다.

#2. 경기 분당신도시를 출발해 서울로 향하던 버스는 남산1호터널을 지나자마자 경찰의 회차 명령을 받았다. 미처 정류장에 닿을 틈도 없이 길 위에서 승객들을 풀어놨다. 퇴계로의 상하행선은 차량들이 뒤엉켜 아수라장을 연출했다. 평소 주말 저녁 빈좌석이 더 많았던 버스에선 입석 승객들이 속출한 터였다.

이곳저곳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등산복 차림의 50대 여성은 "참고 참았는데 더는 못 견디겠다"며 촛불집회장을 찾는 심정을 털어놨다.
삼삼오오 모인 20대 대학생들, 아이들 손을 잡고 탑승한 가족, '정치 농단'을 언급하는 연인까지 대부분 서울 광화문으로 향하는 사람들이었다. 승객 가운데는 호기심에 시위 현장을 찾는 벽안의 외국인도 섞여 있었다.

지난 12일 밤 광화문 교보문고 옆 대로에서 가설 연단에 올라 연설하는 여중생들 / 사진=오상도 기자

지난 12일 밤 광화문 교보문고 옆 대로에서 가설 연단에 올라 연설하는 여중생들 / 사진=오상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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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도래한 정치 과잉의 시대= '정치 과잉의 시대'가 다시 도래했다. 100만 시민이 한 자리에 모여 "나는 과연 국민인가"를 되새겼다. 입에선 "이게 나라냐"는 울림이 메아리쳤다. 대한민국의 길을 찾기 위해 머리를 맞댔지만 아직 이렇다할 결실은 맺지 못한 듯 보인다.

지난 12일 밤 서울 광화문 일대를 뒤덮은 '2016 민중총궐기' 촛불집회장의 표정이다. "국민의 뜻이 우주의 뜻"이란 촌철살인의 문구가 서울광장에 등장했고, '말달리자'를 부른 밴드 '크라잉넛'은 "'말달리자'는 우리 노래인데 요즘 자괴감을 느낀다"며 정치 풍자를 쏟아냈다.

정당·노조 집회에 참석했다가 광화문 광장 밖의 2선으로 물러난 군중들도 시청 부근을 맴돌며 아쉬움을 달랬다. 간헐적으로 가두 행진을 벌였고, 일부는 인근 선술집에 모여 나라의 미래를 걱정하며 술잔을 기울였다.

벌써부터 이번 집회가 2008년 5월을 달궜던 '광우병 촛불시위'의 재판이 될 것이란 우려도 일고 있다. 미국산 쇠고기 수입을 반대하며 전국적으로 불을 밝혔던 촛불집회는 괴담만 양산한 채 자취를 감췄다. 공식 집회를 열었던 '광우병국민대책회의' 관계자들은 경찰의 법 집행 대상이 됐다.

일부 야권 관계자들은 청와대가 이명박 정부로부터 '학습효과'를 얻었다고 분석한다. '버티다 보면 군중이 물러선다'는 얘기다.

조만간 박근혜 대통령이 3차 대국민 담화를 발표하고 진일보한 해법을 내놓을 것이란 전망도 나온다. 그러나 이날 밤 국민이 외친 '질서정연한' 2선 퇴진 내용은 빠질 것으로 보인다. 질서정연한 퇴진은 "모든 걸 내려놓겠다"는 대통령의 선언이다.

정치권도 박 대통령이 당장 하야할 경우 혼란을 피할 수 없다고 본다. 60일 이내 대선을 치러야하는 만큼 정국은 다시 한번 드센 후폭풍에 휘말리게 된다. 야당이 그동안 대놓고 하야를 요구하지 못한 이유다.

지난 12일 광화문 집회 현장에서 정당 관계자들이 '박근혜 퇴진' 등의 문구가 적힌 플래카드를 시민들에게 나눠주고 있다. / 사진=오상도 기자

지난 12일 광화문 집회 현장에서 정당 관계자들이 '박근혜 퇴진' 등의 문구가 적힌 플래카드를 시민들에게 나눠주고 있다. / 사진=오상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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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탄핵은 與·靑의 노림수…탄핵 들어가면 2008년 광우병 집회 재현될 듯= 청와대를 비롯한 여권에선 "차라리 탄핵을 하라"는 목소리도 나온다. 탄핵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박 대통령에 대한 불리한 여론이 반등할 것이란 기대 때문이다.

국회의원 3분의 2의 동의로 탄핵안을 발의하려면 여당인 새누리당 의원 중 20여 명 이상이 탄핵 찬성 쪽으로 이탈해야 한다. 가능성이 다소 낮다. 여기에 헌법재판소는 180일 이내에 탄핵심판을 통해 결론을 내려야 한다. 헌재가 이를 받아들이면 60일 이내에 대선을 치르게 된다. 최장 10개월이 소요된다. 빨라도 정국 안정까지는 6개월이 소요된다.

그간 검찰은 '최순실 게이트'에 대한 수사결과를 발표하고 예고된 시나리오대로 결론을 내릴 수 있다. 사태는 유야무야 묻힐 가능성이 높다.

국민이 촛불을 켜고 광화문 광장에 운집한 까닭이다. 호위무사를 둘러싼 두문불출형 정치가 정상국가의 길을 무너뜨렸고, 이는 고스란히 국민이 부담해야 할 무게로 다가왔다. 너무나 소란했지만 결실이 적었던 정치 과잉의 시대로 회귀하는 현상을 불러왔다.

책임은 누구에게 있는가. 정치권 모두의 공동책임일까. 당장은 박 대통령이 책임을 인정해야 한다.

진정 다시 정치 과잉의 시대다. 우려되는 대목도 있다. 이날 밤 광화문 교보문고 옆 대로에 운집한 청중들의 모습이 그렇다.

이들은 우뢰같은 박수를 쏟아냈다. 거리에는 수천 명의 시민들이 자리에 앉아, 차례대로 연단에 오른 시위 참가자들의 연설에 귀기울였다. 연단 옆에는 전국대학생대표자협의회(전대협) 동우회와 전국대학민주동문회협의회(전민동) 깃발이 나부꼈다.

지난 12일 오후 서울 을지로 인근에서 가두행진을 벌이는 시민들 / 사진=오상도 기자

지난 12일 오후 서울 을지로 인근에서 가두행진을 벌이는 시민들 / 사진=오상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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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생이 연단에 올라 "대통령 하야" 요구하는 시대…'정상국가' 무너진 단면= 자유발언 형식으로 진행된 행사에선 초중고생은 물론 대학생, 일반 시민들이 등장했다. 어렵게 연단에 오른 초등학생도 또랑또랑하게 자신의 의견을 개진했다. 대통령 하야를 주장하는 내용이었다. 한 남중생은 "자랑스러운 대한민국을 다시 세우기 위해 이 자리에 모인 여러분들이 자랑스럽다"고 말했다.

이어 연단에 등장한 여대생은 자신을 이화여대 국문학과 재학생이라 소개했다. 그는 "졸업을 앞둔 평범한 학생이라며 발등에 불이 떨어졌지만 좀처럼 의욕이 생기지 않는다"고 토로했다. 지난 3개월간 학교에서 겪은 시위와 총장 사퇴 등의 사건도 거론했다. 최순실 일가와 관련된 사건들을 '더러운 일'이라고 표현했다.

"희망을 믿고 포기하지 않는다. 함께 살고 싶은 대한민국을 만들어가고 싶다"는 얘기로 연설은 마무리됐다.

예전 광우병 촛불집회 때 '유모차 부대'로 불렸던 아이 엄마들이 도마에 올랐던 적이 있다. 위험한 집회 현장에 아이들을 데리고 나온 것이 무책임한 행동이란 비판이었다. 색깔론까지 덧씌워졌다. 진보·보수로 엇갈려 공방이 오갔다.

이날 촛불집회 현장도 마찬가지였다. 예전 아테네에선 여론의 광장으로 불리는 아고라 프닉스 언덕이 있었다. 이곳에서 민회가 열리면서 아테네 민주주의도 꽃피웠다. 6세기 말 클레이스테네스 치하에서였다.

하지만 참가자들은 엄격히 제한됐다. 현대 사회는 누구나 의사를 표현할 수 있는 민주사회이지만, 몸도 제대로 가누지 못하는 초등생이나, 시험을 앞둔 여중생들이 가설 연단에 올라 대통령 하야를 외치는 현실은 정상국가의 모습이 아니다.

이런 '정치 과잉'의 시대는 독재로부터 탈피해 민주화를 부르짖던 1980·90년대의 모습이었다. 우리 사회의 비극적 단면인 셈이다. 우리는 다시 허무하게 과거로 회귀해야 하나.

국민의 혈세로 자리를 보전하는 국회의원과 국무위원, 그리고 대통령은 이 문제에 답을 내놓아야 한다. 문제는 정치다.



오상도 기자 sdoh@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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