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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 한詩] 흘러내리는 벽/정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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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둥근 벽시계가 걸려 있는 벽은
 아무도 모르게 한 눈금씩 등이 굽는다
 꼬부랑 할머니가 TV를 본다
 동물의 왕국에선
 경쟁자를 물리친 수여우가 암여우에게 구애를 시작한다
 한번 짝을 짓고 나면
 수컷은 끝까지 새끼와 어미를 보호한다네
 수여우는 먹이를 찾아
 눈 쌓인 숲을 헤매고 있네 어려운 계절이야
 바닥이 조금씩 패이고
 쭈글쭈글한 손으로 손주에게
 밥을 떠먹이는 할머니
 밥 속에는 잘게 부서진 돌멩이
 잘게 부서진 못이 잡곡처럼 섞여 있다
 아이가 달려가다 움푹 패인 바닥에
 넘어진다 울음을 터뜨리고
 아이는 한 뼘씩 자란다
 벽은 한 뼘 더 흘러내리고
 할머니도 줄줄 흘러내린다
 수여우는 암여우에게 가져다줄 들쥐를 잡기에 여념이 없고
 할머니는 주어진 못을 다 삼킨 듯 눕는다, 벽에 걸린
 시계가 끊임없이 바늘에 찔리면서도
 둥근 얼굴을 펼치는 동안
 암여우가 또 새끼를 낳는 동안
 할머니는 패인 바닥으로 거의 다 스며들었다

 
[오후 한詩] 흘러내리는 벽/정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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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처음 읽었을 땐 좀 먹먹했다. 할머니가 그리고 외할머니가 떠올라서였다. '우리 강아지 사과 먹을래? 아님, 옥수수 까 주련?' 밤이나 낮이나 아침이나 저녁이나 자꾸 뭘 먹이고 싶어 하시던 할머니와 외할머니. 세상에 할머니들은 다 그러신가 보다, 그렇게 우리를 키우셨나 보다, 우선은 이런 생각부터 들었다. 그런데 시를 다시 읽다 보니까, 어쩌면 결국 내가 할머니를 먹고 자란 거였구나, 외할머니는 또 날 쫓아다니시느라 얼마나 고달프셨을까, 그런 생각이 들어 참 막막해졌다. 그런데 다시 가만히 들여다보고 있자니, '아이 엄마, 아빠는 대체 어디 있는 거지?'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러고 보니 엄마, 아빠는 없네. 엄마, 아빠는 없고 할머니 혼자 아이를 키우고 계셨네. 수여우는 "한번 짝을 짓고 나면" "끝까지 새끼와 어미를 보호한다"고 ?동물의 왕국?에 나오던데. 암여우는 "또 새끼를 낳"고 있다는데. 나만 그런가? 이 시, 생각보다 무섭다. 우린 어떤 희생을 너무 당연하게 여기고 있는 건 아닐까 싶어서.

채상우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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