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냉전시대 뒤통수를 강타했던 추억의 '4대 간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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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타하리·존 르 카레·카와시마 요시코·깐수 정수일…능력자 스파이들 살펴보니


냉전이 극에 달했던 시기, 세계 각국의 정보전을 위한 스파이 파견과 조직 내부의 스파이를 색출하는 작업은 은밀하되 치열하게 이뤄졌다. 스파이들은 제각기 자신이 가진 능력을 최대한으로 발휘해 적의 정보를 아군에 물어다 주고, 필요에 의해서는 아군의 정보 일부를 역으로 적에게 내보이며 자신의 존재증명을 위해 분투했다. 사진 = 영화 '팅커 테일러 솔저 스파이' 스틸 컷

냉전이 극에 달했던 시기, 세계 각국의 정보전을 위한 스파이 파견과 조직 내부의 스파이를 색출하는 작업은 은밀하되 치열하게 이뤄졌다. 스파이들은 제각기 자신이 가진 능력을 최대한으로 발휘해 적의 정보를 아군에 물어다 주고, 필요에 의해서는 아군의 정보 일부를 역으로 적에게 내보이며 자신의 존재증명을 위해 분투했다. 사진 = 영화 '팅커 테일러 솔저 스파이' 스틸 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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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경제 김희윤 작가] "이따금 그녀는 앨릭의 말이 옳다고 생각했다. 사람은 무언가를 믿을 필요가 있기 때문에 믿을 뿐이고, 믿음의 대상 자체는 아무 가치도 없고 기능도 없다. 앨릭은 또 이런 말도 했다. '개는 가려운 곳을 긁지. 개마다 가려운 곳이 달라.'"

- 존 르 카레의 소설 ‘추운 나라에서 돌아온 스파이’ 중

인간은 자신을 알아봐 주는 이를 위해 때때로 헌신하지만, 이 헌신 속에 거짓과 음모, 계략이 숨어있다면 그의 삶은 이내 파국 일로에 접어들어 내내 휘청대기 마련이다. 전 세계가 전쟁으로 휩싸였던 세계대전 시기를 지나 냉전 시대에 이르기까지 유럽에서 동아시아, 그리고 한국을 배경으로 제각각 탁월한 능력을 통해 역사에 한 획을 그은 스파이들을 살펴보았다. 그들의 삶은 때로는 비극으로, 때로는 끝나지 않은 이야기로 남아있지만, 시대와 국가, 대의와 정의라는 명분하에 휘둘렸던 시절은 기록과 증언을 통해 역사가 되었고, 실수가 아닌 수단으로서의 스파이들은 소설과 영화 바깥, 우리 삶 속에서 여전히 숨죽이고 활동하고 있다.

마타하리는 댄서로서의 새 삶을 시작하며 대중의 관심을 모으기 위해 파격적인 의상과 뇌쇄적 춤사위를 선보여 물랭루주를 찾은 남성들의 마음을 단숨에 사로잡았다.

마타하리는 댄서로서의 새 삶을 시작하며 대중의 관심을 모으기 위해 파격적인 의상과 뇌쇄적 춤사위를 선보여 물랭루주를 찾은 남성들의 마음을 단숨에 사로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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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모로 사로잡아 정보를 뺏는다, 마타하리

네덜란드 여인 마르하레타 헤이르트라위다 젤러는 짧은 인도네시아 결혼생활에 종지부를 찍고 프랑스로 건너가 뇌쇄적 의상과 현란한 춤사위로 물랭루주를 사로잡은 댄서였다. 예명은 ‘마타 하리(인도네시아어로 ’태양‘)’. 타고난 미모와 춤 실력으로 단숨에 상류사회 사교계에 진입한 그녀를 주목하고 있던 독일 육군 정보부는 거액의 계약금을 제시하며 프랑스 육군의 정보를 빼내 올 것을 주문하고, 그녀는 정보획득을 위해 접근했던 프랑스 육군 항공대 에이스 파일럿과 염문을 뿌리며 비밀스럽게 스파이 업무를 수행했다.
그녀가 독일군 스파이임을 눈치 챈 프랑스는 그녀에게 독일군을 상대로 이중간첩 역할을 역제안하고, 군 수뇌부 인사를 유혹할 것을 지시했으나 독일군이 이미 정보를 입수해 계획이 수포로 돌아가자 프랑스 육군은 그녀를 반역혐의로 체포해 총살했다. 종전 이후 영국 정보부 기록에 따르면 그녀가 독일에 넘긴 프랑스 정보는 거개가 상류층 인사의 사생활에 관련된 것이어서 독일군은 그녀를 두고 ‘불발탄’이라 칭할 만큼 스파이로서의 능력은 형편없었다고. 그러나 빼어난 미모만으로 양국 정보부의 섭외를 받아 고위인사를 사로잡는 지령을 수행한 사실은 대중의 관심을 불러일으키기 충분했는지 이후 이를 주제로 한 다수의 영화와 드라마가 제작되며 그 존재를 끊임없이 호명하고 소비했다. 사형 직전, 총을 겨눈 사수에게 건넨 그녀의 마지막 유언은 “어서 쏴요. 그걸 계속 들고 있는 것도 힘들지 않나요?”였다고.

존 르 카레는 과거 MI6 요원으로 활동한 전력을 십분 활용해 냉전 이후 펼쳐진 치열한 정보전쟁 속 스파이 세계를 실감나게 묘사, 찬사를 받았다. 사진 = 존 르 카레 공식 홈페이지

존 르 카레는 과거 MI6 요원으로 활동한 전력을 십분 활용해 냉전 이후 펼쳐진 치열한 정보전쟁 속 스파이 세계를 실감나게 묘사, 찬사를 받았다. 사진 = 존 르 카레 공식 홈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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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6 요원의 비밀직업은 소설가? 존 르 카레

영국 외무부 서기관 데이비드 존 무어 콘월은 어느 날 상부의 지시를 받고 독일에서 런던으로 급히 돌아왔다. 그가 새로 맡은 업무는 MI6(영국정보부)의 해외담당작업. 하루아침에 007의 회사 동료이자 ‘요원’이 된 그는 태연히 업무를 수행하며 틈틈이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원래 글은 외무부 근무 시절부터 써오던 것이지만, MI6로 자리를 옮긴 뒤로는 더 생생한 스파이 세계를 묘사한 작품으로 대중과 평단의 극찬을 받았다. 요원 신분으로 자신의 본명을 노출할 수 없었던 그는 첫 소설 발표 때부터 필명인 ‘존 르 카레’를 사용했고, 고료가 입금되는 은행에는 따로 연락을 취해 다소 특이한 당부를 남겼는데 “예금액이 일정 액수를 넘기면 알려달라”는 내용이었다.

동서냉전 시대, 독일을 배경으로 활동한 이중간첩의 활약상을 그린 세 번째 소설 ‘추운 나라에서 돌아온 스파이’가 세계적 성공을 거두며 쌓인 수익으로 은행에서 그에게 연락을 취한 날, 그는 MI6에 미련 없이 사표를 던지고 나와 전업 소설가의 삶을 선택했다. 그즈음 냉전 시대 스파이를 상징하는 거물 인사 킴 필비가 영국 요원들의 신분을 고의적으로 노출할 당시 존 르 카레의 본명도 그 명단에 포함되어 있어 신분이 탄로 난 바 있다. 신상이 노출된 이상 요원의 삶도 사실상 끝났다고 볼 수 있지만 존 르 카레는 요원일 당시 자신의 업무에 대해 오늘날까지도 공개를 거부하고 있다. 아직도 기밀유지규정에 묶여있는 사항이라고 알려져 있다.

제멋대로 공주님이었던 요시코는 결혼 실패 후 사랑에 빠진 일본군을 통해 스파이로서 거듭나 만주 일대를 누비며 화려한 활동을 펼쳤다. 스파이 활동 이외에도 음식점 경영, 앨범 발매 등 보통 사람 이상의 다양한 분야에서 재능을 발휘한 그녀는 요즘 의미로 해석하자면 '아이돌' 과 같은 존재가 아니었을까.

제멋대로 공주님이었던 요시코는 결혼 실패 후 사랑에 빠진 일본군을 통해 스파이로서 거듭나 만주 일대를 누비며 화려한 활동을 펼쳤다. 스파이 활동 이외에도 음식점 경영, 앨범 발매 등 보통 사람 이상의 다양한 분야에서 재능을 발휘한 그녀는 요즘 의미로 해석하자면 '아이돌' 과 같은 존재가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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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로 살겠다고 선언한 공주, 카와시마 요시코

청나라 황실 숙친왕의 14녀 금벽휘는 황실이 몰락 일로에 놓이자 일본과의 협력을 통해 재기를 꿈꾸던 아버지 손에 의해 일본인 실력자 카와시마 나니와에게 양녀로 보내진다. 그때 받은 일본 이름이 카와시마 요시코. 그녀는 실력자의 양녀로 도쿄에서 소학교를 마치고, 나니와의 고향 신슈에서 마츠모토 고등여학교를 다니던 시절엔 말을 타고 등교하는가 하면 교문을 지나서도 말에서 내리지 않고, 교생 선생을 ‘너’라고 부르는 등 오만하고 변덕이 심한 타국의 황녀로 또래 학생들에게 큰 인기를 끌었다. 요시코가 열다섯 되던 1922년 친부 숙친왕이 세상을 떠나자 그녀는 중국으로 가 장례식을 치르고 일본으로 돌아왔으나 학교는 복학을 거부했고, 이후 권총 자살을 기도했다 구사일생으로 살아난 요시코는 그길로 자신의 머리카락을 자르고 “남자로 살겠다”고 선언, 결의문이 신문에 실리는 등 유명세를 치렀다.

몽골 장군 파프체프의 차남 칸쥬르잡과의 짧은 결혼생활을 끝낸 그녀는 상하이로 건너가 일본 총영사관 주재무관 타나카 류키치와 사랑에 빠져 일본군의 스파이로 변모한다. 만주국을 세우기 위해 상하이 사변을 공작하고, 국민당 쑨원의 장남 쑨커를 유혹해 고급정보를 일본군에 건넸을 만큼 그녀는 유능한 스파이였고, 빼어난 외모와 남장취미로 남녀 모두를 사로잡는 매력과 영어, 일본어, 중국어를 유창하게 구사하는 언어능력, 그리고 무엇보다 몰락한 황실의 공주라는 상징성은 누구라도 그녀를 한번 만나보고 싶게 하는 궁금증과 호감의 질료이자 스파이로서 그녀의 가치를 올리는 좋은 무기였다. 이런 재능과 배경, 그리고 불안한 시대적 상황 속에서 갈수록 방탕해진 그녀는 일본이 패망하자 국민당 군대에 체포되어 베이징으로 압송, 한간(漢奸, 매국노)으로 기소되어 총살당했다. 사망 후 그녀의 옷 안주머니에선 메모에 적힌 유서가 발견됐는데, 유년시절부터 거래대상이 되어 일생을 고독하게 산 그녀의 삶이 잘 녹아있다. “집이 있어도 돌아갈 수 없고, 눈물을 흘려도 말할 수 없고, 법이 있어도 바르지 않고, 용서받고 싶어도 누가 해주랴.”

검거 당시 필리핀 여권 속 깐수 교수의 사진은 영락없는 아랍인의 모습이었으나, 그는 자신의 이국적 외모까지 신분을 속이는 데 이용한 북한의 스파이였다. 사진 = MBC 뉴스데스크 화면 캡쳐

검거 당시 필리핀 여권 속 깐수 교수의 사진은 영락없는 아랍인의 모습이었으나, 그는 자신의 이국적 외모까지 신분을 속이는 데 이용한 북한의 스파이였다. 사진 = MBC 뉴스데스크 화면 캡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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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개 국어에 능통한 천재 무함마드 깐수, 정수일

단국대학교 사학과 무함마드 깐수 교수는 제자들과 함께 한국과 레바논의 월드컵 예선경기를 시청하고 있었다. 제자들 모두가 한국을 응원하는 틈에 레바논을 응원하며 호기롭게 웃던 그는 필리핀 국적의 레바논인 2세로 동서문화교류사 강의를 맡아 학점을 후하게 주는 ‘좋은 아랍 교수님’으로 통했다. 그러나 사실 그는 아랍 혈통과는 전혀 무관한 조선족 출신 북한인 정수일이고, 정보수집 임무를 갖고 남파된 공작원으로 1996년 7월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당국에 검거됐다.

중국 길림성 연길에서 나고 자란 조선족 정수일은 북경대 동방학부 수석졸업 후 이집트 유학을 마치고 중동에서 외교관으로 활동하던 수재였으나, 중국 내 소수민족 차별에 크게 실망하고 당시 총리였던 주은래에게 탄원서를 제출해 북한으로 귀화했다. 평양 외대 아랍어 교수 재직 중 정수일의 이국적 외모와 언어능력을 눈여겨보던 노동당은 그를 남파 간첩으로 교육해 폭넓은 첩보활동을 기대했으나, 학자적 성향이 강했던 그는 상부의 기대와 달리 잡지나 신문기사를 송고해 스파이로서 눈에 띄는 성과를 올리지는 못했다. 이런 점이 참작되어 검거 후 재판 과정에서 12년 형을 선고받은 그는 4년을 복역한 뒤 2000년 광복절 특사로 출소, 이후 득별 사면 및 복권을 거쳐 현재 한국문명교류연구소를 설립해 활발한 연구활동을 계속하고 있다. 그는 옥중에서 한국의 아내에게(그는 앞서 중국에서 북으로 귀화 당시 함께했던 아내가 북한에 있었다. 이로 인해 전향을 결심하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다.) 서신을 통해 자신의 심경과 학문적 연구를 기록했는데, 그중 한 구절은 분단 현실에 놓여 안타까운 행보를 계속해야했던 그의 비극적 삶이 잘 드러내고 있다. “내가 구속되는 통에 학부나 대학원에 개설된 강좌가 폐강되고, 갓 출범한 문명교류사호는 조타수를 잃고 바로 난파되고 말았소. (...) 한스런 분단의 비참과 불행은 나 같은 기성세대가 업보로 감수하는 것으로 족하고, 더 이상 우리의 후대들에게 전가되지 말았으면 하는 마음 절절하오.”



김희윤 작가 film4h@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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