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지현 학예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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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람들은 흔히 식물과 곤충이 서로 돕는 공생관계에 있다고들 한다. 식물은 곤충의 힘을 빌어 꽃가루받이(수분, 受粉)를 하고, 매개체 역할을 하는 곤충에게 그 대가로 자신의 꿀을 기꺼이 내준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리라. 식물도 계산할 줄 안다. 에너지를 많이 들여 만든 꿀을 쉽게 내주고 싶지는 않은 것이다. 물봉선이나 제비꽃과 같은 식물은 꽃잎이나 꽃받침이 뒤로 길게 돌출된구조를 만든다. '거' 또는 '꽃부리'라고 부르는 이 구조물 안에 꿀을 꼭꼭 숨겨 놓는다. 꽃 깊숙히 들어와 더 많은 꽃가루를 몸에 묻히는 곤충에게만 꿀을 제공한다. 식물과 곤충이 공생관계에 있다고 하기보다는 서로 속고 속이면서 진화해 왔다는 것이 맞는 표현일 것 같다.


 가장 효율적인 꽃가루받이 방법을 고안한 것은 뭐니뭐니 해도 난과(蘭科) 식물이다. 꽃을 피우는 식물 중 가장 진화한 식물군이기도 한 난과 식물은 전 세계 약 3만종이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아름다운 꽃은 생식을 위해 매우 능률적으로 설계되어 있다. 수분 매개체를 위한 배려 아닌 배려가 엿보이는 꽃 구조 덕분에 난과 식물의 꽃은 무척 독특해 보인다.
 난과의 꽃은 3장의 꽃잎과 꽃잎처럼 보이는 3장의 꽃받침잎으로 구성되어 있다. 3장의 꽃잎 중 측면의 2개(곁꽃잎)는 날개 모양이고 가운데 아래쪽 꽃잎은 입술 모양을 하고 있어 입술꽃잎이라 부른다. 이 입술꽃잎은 난의 종류에 따라 모양새가 다양하고 아름다워 사람들의 눈만 즐겁게 하는 것이 아니라 수분매개체에게도 유혹적인 모양이다. 3분의 1의 난과 식물이 입술꽃잎으로 수분매개체를 유혹하여 꽃가루받이를 한다. 대가도 지불하지 않고.

[사이언스 포럼] 우리는 '나뭇잎'으로 살아가고 있다 원본보기 아이콘

 서양에서 숙녀의 슬리퍼(laddy's slipper)라 불리는 복주머니난(Cypripedium)의 경우에는 입술꽃잎을 주머니 모양의 덫으로 만들어 곤충을 유인한다. 꿀벌난초(Ophrys)의 경우 입술꽃잎이 암컷 벌의 모양, 색깔, 털까지 닮아 수컷 벌을 끌어들인다. 꿀벌난초의 꽃은 심지어 암컷에서 나는 페로몬을 흉내 내어 수컷이 짝짓기를 시도하게 만들지만 결국 곤충에게 제공해 주는 보상은 없다. 만약 꿀벌난초가 곤충의 도움을 받지 못하게 되는 경우에는 꽃가루 덩어리가 아래로 처져 자신의 암술머리에 닿음으로써 자가수분(自家受粉)을 하는 차선책도 가지고 있다.
 최근에는 식물이 생존의 어려움에 처했을 때 나름의 모험을 강행한다는 연구결과도 발표되었다. 연구진은 완두콩의 뿌리를 갈라서 두 개의 화분 - 낮은 농도의 양분이 일정하게 들어 있는 화분(A)과 양분이 일정하지 않고 고농도와 저농도의 영양분이 들쭉날쭉하게 제공되는 화분(B)-으로 나누었다. 그 결과 완두콩 뿌리는 적게나마 양분이 제공되나 장기적으로는 생존이 어려운 (A) 화분보다 '모 아니면 도'인 (B)화분을 선택했다는 것이다.

 우리가 알고 있는 것보다 식물은 지능이 있고 정보처리 능력도 뛰어나다는 것이 학자들의 견해이다. 우리는 '식물'이란 단어를 형용사로 사용해 '아무런 움직임이 없는','하찮은', '무능한'과 같은 의미로 폄하해 쓰고 있다. 초등학교 때 배운 식물의 역할만 되새겨 보아도 식물이 이런 취급을 받는 것은 부당해 보인다. 태양으로부터 에너지를 만들 수 있는 지구상의 유일한 생명체가 식물이다. 식물이야말로 그 누구보다도 열악한 조건 속에서 묵묵히, 치열하게 자신의 역할을 다하고 있다. 우리 태양계 시스템에 문제가 없는 한, 식물은 스스로 에너지를 만들고 가스를 교환하고 지구생태계를 탄탄히 받쳐줄 것이다. 지구상의 생명체가 인간 없이는 유지되어도 식물 없이는 유지될 수 없음은 너무나 자명한 일이다.
 지구의 진정한 경제적 기반은 돈이 아니라 식물의 광합성 산물이다. 인간을 포함한 지구상의 모든 동물이 일상을 유지하기 위해 식물에 의존하고 있지 않은가. 스코틀랜드의 생물학자이자 철학자 그리고 도시계획자이기도 한 패트릭 게데스(Patrick Geddes)의 말처럼 우리는 '나뭇잎'으로 살아가고 있는 셈이다(By leaves we live).
 김지현 서대문자연사박물관 학예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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