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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제림의 행인일기①]서초동 향나무를 지나며

최종수정 2020.02.11 16:37 기사입력 2016.07.01 11: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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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제림 시인ㆍ서울예술대 교수

윤제림 시인ㆍ서울예술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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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오늘도 당신 곁을 지나서 일터로 갔습니다. 백리 바깥의 직장으로 가자면 저는 날마다 길 복판에 장승처럼 서 있는 당신을 지나야 합니다. 당신은 반포대교를 건너온 차들이 강남의 끝이나 서울의 남쪽을 향해 내리달리는 고갯마루에 서 있습니다.

당신은 어떤 물건이 얼마나 오래 묵은 것인지를 이야기할 때 우리가 곧잘 쓰던 표현 그대로, '옛날 고려(高麗)적'부터 그곳에 서 있었다지요. 처음 뿌리를 내린 자리에서 자세 한번 고치지 않고 말입니다. 호시탐탐 더 나은 위치나 포즈를 잡으려고 끊임없이 두리번거리며 종종거리는 저 같은 소인배들은 당신 앞에서 마냥 왜소해질 뿐입니다. 무딘 붓으로 당신이 살아온 '정물(靜物) 870'여년의 사연을 짚어보려 하지만, 실마리를 찾기가 쉽지 않습니다.
끝없이 밀리는 자동차들 그 요란한 진동과 매캐한 연기 속에도 당신은 고개를 바로 세우고 지순한 눈매로 하늘을 우러릅니다. 허리를 곧게 펴고 우리 부끄러운 목숨들을 굽어봅니다. 놀랍고 기막힌 장면도 더러 있겠으나, 대부분은 시시하고 너절한 광경들일 터인데 당신은 지루하다는 표정 한번 짓지 않습니다.

옛날 사람들은 어땠습니까. 이 고개가 '마뉘꼴'이라 불리던 시절에는 범도 나타나고 산적이 출몰할 만큼 으슥한 골짜기였다지요. 아직도 당신의 기억에 남아 있는 길손은 누가 있나요? 혹시, 저 한명회 대감을 가차 없이 꾸짖고 부여 무량사로 향하던 매월당 김시습 같은 사나이나 붓이나 먹을 사러 한양성 들어가던 과천 농부(果農) 김정희 선생 같은 분들은 못 보셨는지요?
서초동 향나무를 지나며

서초동 향나무를 지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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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해보면, 당신은 '천년 사극(史劇)'의 관객입니다. 아니, 어쩌면 조선왕조쯤은 한 화면에 담고 있을 무비카메라입니다. 당신의 장기(長技)는 엄청난 '롱테이크(long take)'지요. 필름을 되돌려보면 별의별 것이 다 보일 것입니다. 여우, 승냥이, 호랑이, 멧돼지… 야반도주하는 사내와 계집, 과거에 떨어지고 돌아가는 서생, 가렴주구로 한 밑천 잡아서 한양으로 돌아오는 탐관오리, 보부상… 임진년의 왜군, 청나라 장수, 행진하는 일본군대, 피난민 행렬, 미군 지프… 냄새 나는 고급세단, 고단한 오토바이….

당신의 기억창고 안에는 알려지기만 하면 국사편찬위원들이 한걸음에 달려올 만큼 놀라운 사료(史料)들도 많을 것입니다. 당신의 양쪽 어깨 너머로 보이는 검찰과 법원이 두려워할 만한 세월의 알리바이도 하나 둘이 아닐 것입니다. 그런 까닭에 당신은 보호를 받고 있는 것이 아닐까요. 아니 당신의 '보호수(保護樹)'라는 타이틀은 어쩌면 보호감찰이나 사찰의 대상을 의미하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그렇게까지 고약한 생각은 밀쳐두더라도, 저는 당신의 삶이 자꾸만 연민스럽습니다. 근력이 부쩍 더 쇠잔해 보이고 온몸의 피돌기도 예전같지 않아 보입니다. 위태롭고 안쓰러운 생각이 연방 일어납니다. 요즘 당신의 자세는 마치 횡단보도의 절반도 건너지 못했는데 빨간색으로 바뀐 신호에 안절부절 못하고 어정쩡 멈춰선 할머니 형국입니다.

어떤 이들은 당신이 저 속리산 정이품 소나무나 세금을 내기도 하는 예천 석송령(石松靈)처럼 팔자가 늘어진 나무인데 무엇이 걱정이냐고 묻습니다. 서울의 최고령 상록수로 갖은 호강을 누리지 않느냐며 눈을 흘깁니다. 틀린 말들은 아닙니다. 당신의 원기를 돋우기 위해 서울시는 수시로 당신 몸에 영양제 링거를 매달고, 커다란 물차와 높다란 사다리를 동원하여 때맞춰 목욕도 시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당신에게 묻고 싶어집니다. "행복하십니까?" 당신은 고개를 저을지도 모릅니다. 산속에서 늙어가는 친구들이 부럽다고 할 것만 같습니다. 너무나 많은 일들을 보고 홀로 기억한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 아느냐 묻고 싶을 것입니다. 사실과 진실을 모두 알면서도 법원과 검찰청 앞을 그저 묵묵히 지나고 있는 목격자의 심정과 다를 바 없을 테지요.

당신에게서 살아남은 자의 슬픔을 봅니다.

윤제림 시인ㆍ서울예술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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