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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동여담]개돼지 정치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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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중은 개돼지' 발언을 한 나향욱 교육부 정책기획관이 19일 파면 중징계를 받았다. 이유는 공직사회의 국민 신뢰 실추와 고위공직자 품위 손상이다. 신뢰와 품위를 문제 삼은 것인데, 그것은 '개돼지'란 표현의 비속함과 국민(민중)에 대한 한 관료의 관점을 징계했다고 볼 수 있다. 표현은 차치하더라도, 나향욱의 '관점'은 유별난 개인 생각일 뿐일까. '민중은 개돼지'라는 말은 영화 '내부자들'에서 조국일보 논설주간 이강희(백윤식 역)가 뱉은 말이고, 나씨는 그것에 감명을 받았던지 영화를 거론하며 다시 곱씹어 뱉었다.

이 말을 전해들은 많은 국민들은, 자신이 인구의 99%에 해당하는 '개돼지 신분'임을 문득 깨닫고 충격과 함께 모멸감에 휩싸였다. 나씨는 신분제를 거론하며 민중은 먹고사는 일만 해결해주면 되며, 정치 따위엔 관여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는 취지의 말도 덧붙였다.
국민을 가리켜 개돼지라 한 표현은 얼른 들어도 기분이 좋을 수 없는 말이지만, 그 말을 들여다보면 꽤 정교한 은유법으로 쓰이고 있다는 걸 발견하게 된다.

개돼지는 개와 돼지다. 개는 먹을 것을 주면 꼬리를 치고 반긴다. 주인에겐 오로지 복종만 한다. 돼지는 오직 먹을 것만 밝히는 동물로 여겨지며 다른 것을 생각하지 않는다. 개는 사람이 되고자 하지 않으며, 돼지 또한 마찬가지다.

개와 돼지는 자주 욕설에 등장하는데, 개는 주로 비굴하거나 인륜을 모르는 존재를 함의하고, 돼지는 더럽고 미련하며 어리석은 존재를 대표한다. 나 기획관이나 신문 논설주간이 99% 민중을 어떻게 바라보는지 그 인식의 틀을 웅변하는 상징물이 아닐 수 없다.
민중 개돼지론의 선구자는 놀랍게도 중국의 노자(老子)이다. 그는 이런 말을 했다. "언제나 백성들을 무지한 상태가 되게 하고 무욕한 상태가 되도록 만들어라. 똑똑한 자들이 감히 뭔가 일을 벌이지 않도록 하라.(常使民無知無欲, 使夫智者不敢爲也)" 백성이 뭔가를 알고 뭔가를 욕망하지 않도록 지도자가 조정해야 한다는 생각. 그리고 똑똑한 자가 나서지 않도록 만들어야 한다는 생각. 놀랍게도 나향욱의 생각, 이강희의 생각과 빼닮아 있다.

다만 노자는 '개돼지'란 말만 안했을 뿐이다. 노자가 도덕경 앞줄(제3장)에서 저런 말을 한 배경은 뭘까. 백성들의 민주의식 함양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들이 아무 걱정 없이 살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주는 것이라는 생각이다. 고대의 이 지도자에겐 정치적 민주주의보다 백성의 생계문제가 더 급했다. 조물주가 만든 자연의 원칙과 닮은, 스스로의 생리에 순응하고 사는 이상적인 세상을 꿈꾸었다. 자연 속의 피조물들은, 조물주가 될 꿈을 꾸지 않으니 리더와 피지배자는 엄격한 신분의 벽이 있을 수밖에 없다.

1%가 세상을 이끌어가며 모든 규칙을 장악한다는 생각은, 핵심적인 기득권자가 지니기 쉬운 신념인 게 사실이다. 권력자나, 재벌, 언론, 군부, 명망 높은 지식인은 1% 역할론을 은밀한 신앙처럼 공유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나향욱이 다만 과격하게 말했을 뿐이지, 현실론적으로 별로 틀린 게 없다는 생각을 부전지로 붙이고 있었을까. 언론에 자주 등장하는 그 1%들이, 자신의 신분을 망각하고 짖어대는 99%를 깊이 경멸해온 사회. 나향욱이 까발린 것은 대한민국 특권층의 골수에 박힌 '뇌구조'인지 모른다.

개돼지들은 분노했지만, 그 분노와 무관한 사람들은, 마음 깊숙히 넣어두고 있던 '정신적 신분제'를 들킨 느낌이 아닐까. 나향욱을 자른다고, 이 땅에 깊이 스며든 그 반민주적인 특권철학까지 잘라낸 건 아니다.
 
빈섬(이상국 디지털뉴스룸 부국장) isomi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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