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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재 칼럼]브렉시트와 '실질적 민주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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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재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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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의 브렉시트 국민투표 결과를 놓고 전 세계가 충격에 빠졌지만 누구보다 가장 크게 놀란 것은 아마 영국인들 자신인 듯하다. 개표가 끝난 직후 영국 구글에서 가장 많이 검색된 질문 중 하나가 "EU가 뭐예요?"였다는 사실이나 "우리가 대체 무슨 짓을 한 거지?"라는 자탄 속에 재투표 요구 목소리가 커지고 있는 것이 영국인들의 충격과 당혹감을 잘 보여준다. 영국인들도, 세계인들도 다 같이 충격과 함께 당혹감이 큰 것은 개표결과뿐만 아니라 투표의 중대함에 비해 그것이 치러진 과정이 이렇듯 허술했나, 라는 아연함에서 비롯되고 있다. 잔류파들의 주장처럼 "거짓 정보에 속아 탈퇴에 찬성한 유권자가 많았던" 것에 투표결과가 얼마나 좌우됐는지는 알기 어렵지만 사전조사에서 여론이 출렁이는 양상을 보였던 것이나 개표 후 영국인들 스스로 보이는 의아함 등을 보면 대체로 충분한 이해와 숙고 없이 감정적인 판단을 한 이들이 많았다는 건 분명한 것 같다. 지금 우리는 영국인들에겐 자부심을, 다른 나라 사람들로부터는 경의를 갖게 해 온 근대 민주주의의 종주국의 명예가 땅에 떨어지는 것을 보고 있는 것이다.

근대 민주주의의 본산이 이 겨우 이 정도인가라는 실망감은 민주주의의 역사가 오래됐다는 것이 결코 민주주의의 공고함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 더욱 분명해지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와 같은 충격과 실망이 신흥 민주주의의 중심 미국의 '트럼프 현상'과도 겹치면서 민주주의 자체에 대한 비하와 냉소를 더욱 부추기고 있다. "민주주의는 정치가 현명하지 못한 대중들의 무지하고 근시안적인 견해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며, 폭도들의 통치가 되기 쉬우며 그래서 인민이 아닌 '오합지졸(the rabble)'이란 용어를 사용해야 한다"는 조지프 슘페터의 악담도 떠올려진다.
그러나 우리가 지금 보고 있는 것은 민주주의 그 자체라기보다는 미흡한 민주주의, 불구의 민주주의라고 봐야 한다. 민주주의의 한 실패이자 한계를 드러내면서 역설적으로 과제를 제기하고 있는 것이다.

민주주의는 결정적으로 선거에 의해 작동된다. 그리고 선거는 여론에 의해 결정된다. 그러나 많은 경우 여론이 공론(公論)으로로까지 나아가지는 못한다. 많은 대중의 의사의 집적으로서의 여론이 곧 공론인 것은 아니다. 많은 이들이 참여한다고 해서 합리적인 결정이 내려지지는 않는다. 이번 브렉시트 투표는 투표율만 놓고 보면 72% 이상의 높은 참여율을 보였지만 공론은 투표율을 높이는 문제 이상이다. 문제는 정치참여의 양적인 증대뿐만 아니라 정치 참여의 본질과 방식을 제고하는 것이다. 형식적 민주주의에 머물지 않는 실질적 민주주의인 것이다.

예컨대 '숙의 민주주의'라고 불리는 것이 요구하는 것, 즉 무지나 교조적인 것에 반대되는 사실을 중시하고, 근시안적인 것과 반대되는 미래를 중시하며 이기적인 것과 반대되는 타인을 중시하는 시민들의 형성이 그 한 조건인데, 그럴 때 '오합지졸'이 아닌 '시민'에 의한 민주주의가 가능한 것이다.
이번 브렉시트 투표는 '시민'을 만들지 못하거나 '시민'이 무력한 영국 사회의 실상을 보여준 것이었다. EU 잔류 운동을 이끌었던 영국 집권 보수당과 주요 정당들은 시민을 형성하지 못한 것에 대한 책임에 대해 부메랑으로 일격을 당한 것이다. 소외되고 배제된 이들에 의해 '한 방' 먹은 것이다.

우리 헌법에는 '적법절차의 원리'라는 것이 있다. 이 조문은 법적인 절차가 보장돼 있느냐를 넘어서 그 절차의 실질적 적정성과 정의에의 합치성까지 요구하는 것으로 해석되고 있다.

실질적 적법절차와 같은 '실질적 민주주의'의 문제, 이것이 이번 브렉시트 투표가 던지는 한 교훈이다. 브렉시트가 EU의 개혁 움직임을 촉발하고 있는 것처럼 영국 민주주의의 시련이 민주주의 국가들에게 교훈을 던지고 있다. 민주주의는 '피'가 아니라 '문제'를 먹고 자란다고 말하고 싶다. 문제가 던지는 도전에 대한 응전을 통해 해결역량을 높이면서 민주주의는 더욱 튼튼해진다. 이것이 브렉시트가 우리 정치에게도 메시지를 던지는 이유다.





이명재 논설위원 promes@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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