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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재 칼럼]희귀해진 '책임 있는 이들의 책임 있는 발언'

최종수정 2016.05.23 10:58 기사입력 2016.05.23 10: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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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재 논설위원

이명재 논설위원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이 이번 주에 최초의 원자폭탄 피폭지인 일본 히로시마를 방문하는 것은 우리에게는 무척이나 당혹스러운 사태다. 취임 초기부터 '핵 없는 세계'를 표방한 오바마의 글로벌 비핵화 의지에서 비롯된 방문이며 "(원폭) 피해자에게 사과할 생각은 없다"는 설명에도 불구하고 그의 히로시마 방문은 일본을 '가해자'에서 '피해자'로 전환시켜 주는 결과로 일단 받아들여진다. 침략과 전쟁범죄에 대해 분명한 사죄는커녕 국제사회에 목소리를 높이고 있는 일본의 아베 신조 정부에 이번 방문은 일대 '외교적 개가'라고 할 만하다.

일본의 표정에서 승리자가 된 듯한 득의양양이 여실히 느껴진다. 우리로 하여금 자괴감을 갖지 않을 수 없게 하는 '초현실적 현실'이다. 그러나 일본은 과연 승리자인가. 일본의 저명한 문학평론가인 가라타니 고진의 유명한 말을 빌리자면 일본의 승리(로 비쳐지는 지금의 상황)는 '자유'와 맞바꾼 것이다. 고진에 따르면 책임은 자유와 관련이 있다. 고진은 "이미 일어나버린 일에 대해 자신의 자유에 의한 것이었다고 받아들일 때 책임을 질 수 있게 된다"고 말한다. 즉 나의 자유로운 선택에 의한 결과라는 것을 인정하고 받아들일 때, 그에 대한 책임을 지려 할 때, 그럴 때만이 진정 자유롭다고 말할 수 있다는 것이다. 자국의 대표적인 사상가가 말하듯 자신의 행위에 대해 '반성하지 않는 일본' '사죄하지 않는 일본', 그래서 '책임을 지지 않는 일본'은 영영 자유를 얻을 수 없다.

우리 사회에서도 책임을 지지 않으려 함으로써 자신의 '부자유'를 보여주는 이들의 말을 연일 듣고 있다. 누가 보더라도 책임의 상당 부분이, 설령 책임의 전부는 아니더라도 최소한 그 일부는 있어 보이는 이들이 자신의 책임을 인정하기를 매우 꺼리는 말들이었다. 가습기 살균제 피해자들에게 직접적인 사과를 거부하는 정부, 수백 명의 목숨을 앗아간 군인들의 발포에 대해 자신은 아무런 관련이 없다고 강변하는 전직 대통령, 선거 참패에 대한 책임을 지는 발언을 좀처럼 하지 않으려 하는 최고권력자.

가습기 사건의 담당 부처의 장관은 '수많은 희생자를 낸 비극적인 사건'에 대해 "업체들의 장삿속과 제품 안전관리 법제 미비가 중첩돼 일어난 사고"라고 말한다. 상혼(商魂) 탓이며 제도 탓이니, 피해자들을 찾아가 봤냐는 질문에도 "내가 왜 만나야 하느냐"고 오히려 힐난하듯 반문한다. 전두환 전 대통령은 한 월간지와의 인터뷰에서 "사실 광주사태와 나와는 아무 관계없다"고 버젓이 말했는데, 그의 말을 믿으려면 1980년 5월 광주에서 계엄군이 무차별 발포할 때 대통령 이상의 실권자였던 그가 '당시 작전지휘체계에 없었다'는 믿기 어려운 사실부터 믿어야 한다. 국정의 최고 책임자이며 여당의 사실상의 총재인 최고권력자는 무엇보다 정부여당에 대한 심판이랄 수 있는 이번 총선 결과와 자신은 무관한 듯한 태도를 보이고 있다. 우리 사회에서 언젠가부터 보기 힘들어진 것 중의 하나가 '책임 있는 이들의 책임 있는 발언'인 것도 이들의 말과 무관치 않다. 책임 있는 이들의 말들은 책임을 매우 모호한 것으로 만들고 있다.

이들의 말이 보여주는 것은 말하자면 결과는 있는데 원인이 없는 기이한 현상이다. 이들에게서 자신이 그 상황의 중심, 혹은 정점에 있는데도 변방으로, 낮은 곳으로 밀어내려는 안간힘을 본다. 스스로가 자유로운 존재가 아니라는 것을 자인하는 것이다. 이건 책임의식의 문제가 아닌 어떻게 현실을 보느냐는 인식의 결함의 문제다. 그것은 주변인들을 힘들게 하지만 무엇보다 그 자신들의 불행이다.
일본의 우파적 정치인들은 '정상국가(normal state)'라는 말로 일본이 나아갈 방향을 제시한다. 여기서 정상국가는 '스스로 판단해 개별적이고 집단적인 자위권을 행사할 수도 있는 국가'라고 정의된다. 그러나 일본이 국제사회에서 아직 '정상국가'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는 이유가 거기에 있지는 않다. 일본이든, 우리 사회의 책임 있는 이들이든 '정상'이 무엇인지를 생각하는 것에서부터 '책임'도 나올 것이며, 그리하여 '자유'도 얻을 것이다.


이명재 논설위원 promes@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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