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의 표정에서 승리자가 된 듯한 득의양양이 여실히 느껴진다. 우리로 하여금 자괴감을 갖지 않을 수 없게 하는 '초현실적 현실'이다. 그러나 일본은 과연 승리자인가. 일본의 저명한 문학평론가인 가라타니 고진의 유명한 말을 빌리자면 일본의 승리(로 비쳐지는 지금의 상황)는 '자유'와 맞바꾼 것이다. 고진에 따르면 책임은 자유와 관련이 있다. 고진은 "이미 일어나버린 일에 대해 자신의 자유에 의한 것이었다고 받아들일 때 책임을 질 수 있게 된다"고 말한다. 즉 나의 자유로운 선택에 의한 결과라는 것을 인정하고 받아들일 때, 그에 대한 책임을 지려 할 때, 그럴 때만이 진정 자유롭다고 말할 수 있다는 것이다. 자국의 대표적인 사상가가 말하듯 자신의 행위에 대해 '반성하지 않는 일본' '사죄하지 않는 일본', 그래서 '책임을 지지 않는 일본'은 영영 자유를 얻을 수 없다.
가습기 사건의 담당 부처의 장관은 '수많은 희생자를 낸 비극적인 사건'에 대해 "업체들의 장삿속과 제품 안전관리 법제 미비가 중첩돼 일어난 사고"라고 말한다. 상혼(商魂) 탓이며 제도 탓이니, 피해자들을 찾아가 봤냐는 질문에도 "내가 왜 만나야 하느냐"고 오히려 힐난하듯 반문한다. 전두환 전 대통령은 한 월간지와의 인터뷰에서 "사실 광주사태와 나와는 아무 관계없다"고 버젓이 말했는데, 그의 말을 믿으려면 1980년 5월 광주에서 계엄군이 무차별 발포할 때 대통령 이상의 실권자였던 그가 '당시 작전지휘체계에 없었다'는 믿기 어려운 사실부터 믿어야 한다. 국정의 최고 책임자이며 여당의 사실상의 총재인 최고권력자는 무엇보다 정부여당에 대한 심판이랄 수 있는 이번 총선 결과와 자신은 무관한 듯한 태도를 보이고 있다. 우리 사회에서 언젠가부터 보기 힘들어진 것 중의 하나가 '책임 있는 이들의 책임 있는 발언'인 것도 이들의 말과 무관치 않다. 책임 있는 이들의 말들은 책임을 매우 모호한 것으로 만들고 있다.
이들의 말이 보여주는 것은 말하자면 결과는 있는데 원인이 없는 기이한 현상이다. 이들에게서 자신이 그 상황의 중심, 혹은 정점에 있는데도 변방으로, 낮은 곳으로 밀어내려는 안간힘을 본다. 스스로가 자유로운 존재가 아니라는 것을 자인하는 것이다. 이건 책임의식의 문제가 아닌 어떻게 현실을 보느냐는 인식의 결함의 문제다. 그것은 주변인들을 힘들게 하지만 무엇보다 그 자신들의 불행이다.
이명재 논설위원 promes@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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