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영미, '한국대중예술사, 신파성으로 읽다'
이영미는 차근차근 설명한다. 책은 논문 덩어리다. 그는 이렇게 시작한다. "이 책은 근ㆍ현대 한국대중예술ㆍ대중문학에 나타난 '신파성'이 시대에 따라 어떻게 변주ㆍ변화되었는지, 그리고 그 의미는 무엇인지를 살피는 연구다." 그의 학문은 깊다. 그래서 그의 글은 읽기에 어렵지 않다.
이영미가 보기에 신파, 신파성을 띤 작품들은 20세기 중반부터 촌스럽고 통속적이며 저속하다는 비판과 조롱을 받아왔다. '신파', '신파적'이란 말은 그 자체로 평가절하의 언어가 되었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신파적 미감(美感)은 인기의 중심에 있었고, 20세기 후반에도 오랫동안 대중적 인기를 모아왔다.
신파성에 대한 연구는 "대중이 세상의 슬픔과 고통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견디고 드러내며 살아갔는지 살펴보는 일"이다. 대중예술은 고통스러운 세계에 대한 거부ㆍ저항이라는 측면과 고통의 정서적 해소ㆍ위안을 통해 순응하게 하는 양면성이 있다. 그러니 그 연구는 예술의 본질에 대한 점검이다.
이영미는 신파성과 그 전유방식이 자본주의적 근대의 대중이 지니는 세계전유 방식 중 기초적인 것으로 본다. 신파성의 핵심을 억압적 세계 속에서 욕구와 욕망을 억눌린 무력한 자아가 저항하지 못하고 '스스로' 굴복함으로써 갖게 되는 자학과 자기연민의 태도로 보는 것이다.
저자는 신파성의 정체를 찾아 시간여행을 떠난다. 신문연재소설 '쌍옥루(1912)'와 '장한몽(1913)', 연극 '사랑에 속고 돈에 울고(1936)', 이미자의 노래 '동백 아가씨(1964)'를 거쳐 영화 '미워도 다시 한 번(1968)', 심수봉의 노래 '남자는 배 여자는 항구(1984)', 텔레비전 드라마 '모래시계(1995)'를 살핀다.
'장한몽'을 모르는 독자도 '김중배의 다이아반지'는 안다. "김중배의 다이아 반지가 그렇게도 탐이 났단 말이냐? … 놓아라. 놓지 않으면, 이 다 떨어진 구둣발로 네 가슴 짝을 차버리고 말겠다!", "수일 씨의 아픔이 사라지고 괴로움이 풀리신다면, 백 번 천 번이라도 이 멍든 가슴팍을 짓밟아주세요!"
연극과 영화 심지어 코미디로 수없이 재생된 이 대사. 원본 '장한몽'에 이런 대사는 없다. 그러나 허구의 작품 세계에 그럴 법한 대사 한 줄 치기는 가끔 있는 일이다. '애드리브'가 이 전통을 계승하지 않는가. 그런데 가령 이런 애드리브, 압도적이고도 불가해한 이 들이댐은 어떻게 설명해야 하는가.
"부모님을 다 흉탄에 잃고 고아가 되어 어린 동생들을 데리고… 집으로 이사하여 보니 방 다섯 개 중에 관리인과 가정부 방, 짐을 놔둔 방을 빼니 사용할 수 있는 방은 두 개 뿐이더라…."
나의 독서는 책에서 자기연민, 굴복, 회피 같은 언어를 만나 행간을 부유한다. 책을 덮고 생각하느니, 만약 신파가 혐오스럽다면 신파의 원죄인가 오ㆍ남용의 대가인가. 신파는 회피의 기술일까. 그래서 자꾸 밖으로 달아나게 만드는가. 신파는 공포의 산물인가. 그래서 알아듣지 못할 말로 철벽을 치게 만드는가. huhball@
<이영미 지음/푸른역사/3만8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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