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이카 시대' 30년, 단순 이동수단 아닌
긴 세월 함께한 동반자 의미 더해져
누군가를 추억하는 매개체이자
시대의 기억을 끄집어내는 이미지
이제 자동차는 보통 사람들의 일상에 없어서는 안 될 존재다. 1980년대 '마이카 시대'가 열린 뒤 30년이 더 흘렀다. 많은 이들에게 '재산목록 1호'로, 가족단위 여가생활을 위해 발이 되어 준 자동차는 단순한 이동수단 그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자동차는 긴 세월 추억을 함께 해 온 친구나 동반자가 되었다. 그래서 자동차 디자인에 개성과 감성, 스타일이 강조돼왔다. 요즘은 조각품처럼 멋스럽고 화려한 콘셉트 카가 자주 소개된다. 정보기술(IT)과 접목한 인공지능 자율주행차 개발은 세계적인 흐름이다. 미래형 자동차는 스스로 움직이는 생명체와 같다.
미술 작가들이 현대 과학기술의 산물인 자동차를 예술언어로 풀어낸 전시가 있다. 자동차와 관련된 개인의 추억과 문화적 의미를 담아 자동차라는 기계와 인간이 삶에서 맺는 관계성을 주제로 한 스토리텔링이 작품으로 구현됐다. 지난달 30일 서울 노원구 서울시립 북서울미술관을 찾았다. 여러 작품 중에 1998년식 쏘나타3가 눈에 들어왔다. 밖으로 드러난 엔진에 소리와 향기를 뿜어내는 장치가 물방울에 덮인 채 피스톤처럼 작동하며 여러 호스들과 연결됐다. 빗소리와 모과향이 느껴진다.
정연두(47)의 '여기와 저기 사이'란 사진작업은 어느 탈북 새터민이 1994년 서울의 한 음식점 밖에서 본 자동차 풍경에 관한 기억을 끄집어내 이미지화했다. 아크릴판에 배접한 각각의 이미지 열한 개를 1㎝ 간격으로 겹쳐 하나의 프레임 안에 재구성했다. 화면 안쪽에 오디오 시스템을 보이지 않게 설치했다. 새터민의 음성이 들린다. 작가가 한 인터뷰다. "함흥은 큰 도시에요. 함흥시 벗어나면 비포장길이고, 함흥 안에는 길이 포장돼 있어요. 아반떼나 쏘나타같은 고급 승용차를 보려면 두 시간 넘게 서 있어야 볼까말까 해요. 그런데 서울 와보니까 강변북로나 내부순환도로 차가 너무 많아서 길이 막히더라고요. 냉면을 먹고 나왔는데, 주차된 차들에 붙은 상표를 보니 영어로 돼 있던데 좀 놀랐어요."
이 작품에서는 남북한의 문화 차이가 확연히 드러난다. 자동차가 여전히 사회적 위계나 권력, 부와 욕망을 상징하는 면도 간과할 수 없다. 작품에 등장한 차들은 대개 세단형 대형 자동차들이다. 1990년대 우리사회는 이런 차들을 선호했다. 1991년 대한민국 경차 1호 '티코'가 나왔을 때 "신호에 걸린 티코가 다시 출발하려는데 꼼짝도 하지 않아서 보니 바퀴에 껌이 붙었더라"고 할 정도로 작은 차에 대한 무시가 노골적이었다.
홍원석(34)은 '아트택시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다. 그는 지난 2011년부터 참가자를 모집, 차에 태우고 원하는 목적지까지 데려다 주며 얻은 다양한 이야기를 담아냈다. 이번에는 한 가족의 추억이 깃든 '각그랜저(1세대 그랜저)'를 활용, 관람객의 신청을 받아 차 안에서 인터뷰하고 그 영상을 미술관 안에서 상영한다.
이번 전시는 서울시립미술관과 현대자동차가 공동 기획했다. 제목은 '브릴리언트 메모리즈 시즌 2: 동행 전'이다. 두 층에 설치, 영상, 조각 등 작품 열두 점을 전시했다. 폐차 직전인 낡은 차를 재활용하거나 영상이나 사진에 차에 담긴 사연을 담아 완성한 작품들이다. 현대자동차 디자이너로 일한 이옥분 디자인학 박사(48)는 이번 전시와 관련해 이날 '문화로 읽는 자동차 디자인'을 주제로 강연했다. 그는 "자동차 디자인도 시대의 산물이다. 대형 자동차와 권위적인 스타일에서 벗어나 다양한 디자인이 나오는 것도 자동차를 쓰는 사람들의 요구와 연관된다"며 "이는 자동차와 사람의 '동행'이란 주제와도 맞닿아 있다"고 했다. 전시는 오는 21일까지. 02-2124-8800.
오진희 기자 valere@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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