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주디스 버틀러의 '젠더 허물기'가 지금 출판된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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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경제 임온유 기자] "이슬람국가(IS)보다 무뇌아적 페미니즘이 더 위험해요." 팝 칼럼니스트 김태훈이 지난해 2월 패션지 '그라치아'에 기고한 글이다. 그는 한국 사회 지식인층의 비상식적인 성평등 인식을 들췄다. 같은 해 7월에는 Mnet의 '쇼미더머니4'에 출연한 가수 송민호의 랩이 논란거리가 됐다. "MINO 딸내미 저녁 산부인과처럼 다 벌려." 여성에게 성적 모욕감을 주는 가사가 여과 없이 전파를 탔다.


여성 혐오에 질릴 대로 질린 이들은 '여성 혐오를 혐오하는' 움직임을 보이기 시작했다.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나는 페미니스트입니다'라는 태그 걸기 운동이 일었고 '메갈리아'라는 사이트는 '여성 혐오'를 '남성 혐오'로 맞받아쳤다. 이러한 분위기를 타고 리베카 솔닛의 '남자들은 자꾸 나를 가르치려 든다', 게일 루빈의 '일탈', 케이트 본스타인의 '젠더 무법자' 등 페미니즘을 말하는 책들이 연이어 나왔다. 2004년 주디스 버틀러가 쓴 책 '젠더 허물기'가 지금 국내에 출판된 이유도 다르지 않다.

버틀러는 1990년 '젠더 트러블'을 출간하며 페미니즘 담론 안팎에 커다란 논란을 불러일으킨 인물이다. 그는 기존의 섹스(sex)와 젠더(gender) 구분법을 문제 삼으며 기꺼이 논란의 중심에 섰다. '섹스는 자연적 특징(염색체, 호르몬, 생식기 등)에 따라, 젠더는 문화적ㆍ심리학적 방식으로 규정된다.' 1968년 로버트 스톨러가 '섹스와 젠더'에서 처음 사용하며 가장 익숙해진 이 구분법에 반기를 든 것이다. 버틀러는 이 구분법을 '권력'의 산물이라고 했다. 제도와 실천, 담론을 위해 도식적으로 나눴을 뿐 섹스 역시 젠더와 같이 문화적으로 구성된다는 것이다. '성은 존재하나 정해진 성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그의 시선은 주류 페미니즘의 근간을 흔들었다. 당시는 페미니스트들이 여성을 남성 중심의 권력 구조에서 해방시키는 일에 몰두하던 때. 여성이라는 단일 주체를 해체하려는 버틀러의 주장은 그들의 행동 근거를 약화시키기에 페미니즘계는 갑론을박했다. 그럼에도 버틀러의 주장이 설득력을 가질 수 있었던 이유는 그 문제적 저작이 저자의 경험에서 비롯되었기 때문이다. 1956년 유복한 유대계 집안에서 태어난 그는 열여섯 살 때에 자신이 레즈비언임을 커밍아웃 했다. 그때의 그는 비난받고 추방될까 두려웠다고 한다.

'젠더 트러블'은 고통스러운 경험을 이론적 과제로 삼아 쓴 책이다. 버틀러는 이 책에서 우리의 성적 정체성에 권력의 문제가 깃들어 있음을 보여줌으로써 설득력을 얻었다. '젠더 허물기'는 '젠더 트러블'로 대표되는 버틀러의 초기 이론에 변화가 생겼음을 알리는 책이다. '젠더 트러블'이 비결정적이고 불확정적인 개인의 젠더가 구성되는 이론을 논의했다면, '젠더 허물기'는 이러한 성적 비결정성과 불확정성으로 고통 받는 인터섹스와 퀴어의 삶을 논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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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자신의 철학에 윤리와 정치를 더하기 시작한 계기는 2001년 일어난 9.11 테러다. "우리는 그날 뒤 폭력이 저질러지고 폭력을 겪고 폭력을 두려워하며 더 많은 폭력을 계획하는 모든 곳에 있었다. 폭력은 최악의 질서의 전조이자 인간의 나약함이 가장 공포스럽게 노출되는 방식이 분명하다…." 그는 생각의 변화를 '젠더 허물기'에 담았다. '나'에서 '우리'로 인식을 확대하고 이론적 정교함에서 현실적 정치성으로 나아가며 소수자에 대해 성찰한다. 1999년부터 2004년까지 쓴 글들을 모은 책이기에 각 장의 상호 관련성이 적어 보일 수 있다. 하지만 이론을 뚫고 현실로 나오기 위한 노력이 통일성을 만든다.


<주디스 버틀러 지음/ 조현준 옮김/ 문학과지성사/ 2만5000원>


임온유 기자 ioy@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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