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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기념품이 품은 거대한 기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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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진석의 책과 저자] 갈망에 대하여

갈망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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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경제] 우리는 자주 착각 또는 실수를 한다. 책을 읽어 지식을 쌓겠다고. 책을 읽으면 영혼이 살지고 교양이 풍부해진다고. 그러나 꿈에서도 가능하지 않은 일이다. 꿈 깨라. 책에 대한 헛된 기대를 품고 첫 장을 함부로 열었다가는 골병들기 딱 좋다.

물론 책은 정보의 덩어리다. 시간을 죽이기 위해 읽는 잡스런 책이 아니라면. 정보라는 영양분은 이를 섭취하여 삭여낼 준비가 됐을 경우에만 유용하다. 그렇지 않다면 몸만 괴롭고 마음까지 상한다. 잘못 삼켰다가는 다 게워내야 한다. 위로든 아래로든.
'갈망에 대하여'를 읽기 위해서는 상당한 준비가 필요하다. 어려우니까.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면 대략 30쪽, 좀 버텨 봐야 50쪽 근처에서 책장을 덮을지도 모른다. (이 구간을 돌파해야 숨통이 트인다) 매력적인 표지 디자인과 카피처럼 쓴 부제목(아니면 진짜 카피)은 속임수 같다.

'미니어처, 거대한 것, 기념품, 수집품에 관한 이야기'.

이걸 읽고 "아, 김정운 교수가 쓴 '남자의 물건' 비슷한 책인가 보다"하고 생각했다. 그러나 많이 다르다. '갈망에 대하여'는 그 입구부터 깔깔해서 열고 안으로 들어가기가 쉽지 않다. 구차하지만 출판사에서 공들여 쓴 해설문을 읽어도 큰 도움은 안 된다.
"'갈망에 대하여(On Longing)'는 '갈망이라는 일종의 통증' 혹은 '죽은 것을 산 것으로' 만들려는 '서사의 욕망'에 관한 것이다. 미니어처 책, 18세기 소설, 톰 섬의 결혼식, 허풍스러운 이야기, 관광이나 노스탤지어의 대상 등 다양한 문화적 형태를 주제로 삼고 있다."

당장 '서사의 욕망'이 목구멍에 딱 달라붙지 않는가. 책을 쓴 수잔 스튜어트는 시인이자 비평가다. 디킨슨대, 존스홉킨스대, 펜실베이니아대 같은 곳에 다니며 영문학, 인류학, 시학을 공부해 석ㆍ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나에게 그의 글은 다양한 전공 때문인지 몹시 어렵다.

스튜어트의 '갈망'이란 '간절한 욕망', '임신 중 여성이 느끼는 공상 섞인 열망', '소유물 또는 부속물'이다. 그는 우리가 무언가를 이야기할 때 그 밑바닥에 고여 있는 욕망에 주목한다. 이야기에 새겨진 욕망의 구조를 미니어처, 거대한 것, 기념품, 수집품 등을 대상으로 삼아 유형화한다. 그 과정에서 서사의 도구인 언어와 그 특성으로서 '기호'에 주목한다.

"기호의 자의성을 교환가치의 자의성과 비교해볼 수 있을 것 같다. 교환가치에는 상품의 물질적 속성이나 상품이 형성되기까지 투입된 노동의 양과는 아무런 본질적 연관성이 없으나, 그 가치가 사회적으로 결정된다는 점에서 보면 결코 자의적이지 않다."

'기호의 자의성'에 대한 담론은 구조언어학에 대한 지식을 전제로 한다. 구조언어학의 관점에서 언어는 사회적인 규칙이다. 내가 마구 짖어대는 개를 '빡'이라고 부를 수는 있지만 누구도 알아듣지 못한다. 페르디낭 드 소쉬르는 사회적 규칙으로서 언어를 '랑그(Langue)'라고 했다. 랑그는 언어활동의 체계적 측면이다. 개인적이고 구체적인 발화의 실행과 관련된 측면은 '파롤(Parole)'이다.

그런데 개를 '개'라고 부르는 대신 모두가 '빡'이라고 부르기로 약속했다면, 개는 '개'가 아니고 '빡'이다. 이렇게 볼 때 기호는 지시하는 대상과 아무 상관도 없다. 소쉬르는 이것을 '기호의 자의성'이라고 했다.

스튜어트는 언어가 모든 사람에게 같은 것을 지시할 수 없으며 발화라는 구체적인 실천 행위 안에서 기능한다고 주장한다. 아직 입 밖으로 나오지 않은 추상적인 말이 생각이고 생각이 문장 단위로 실현된 것이 발화이다.

저자가 보기에 인간의 갈망은 언어의 불완전성에서 싹튼다. 기표(signifiant)와 기의(signifie), 혹은 물질성과 의미의 관계가 탄생하는 지점과 초월되는 지점이 갈망의 서사가 닿고자 하는 곳이다. 그리고 기념품은 모든 서사에서 드러나는 노스탤지어, 즉 기원을 향한 갈망을 보여주는 사물이다.

엽서, 사진, 코르사주에서 떼어낸 리본, 에펠탑 모형 같은 기념품은 물리적 축소와 서사를 통한 의미 강화를 이용해 특정한 순간을 하나의 물질 안에 보존한 결과물이다. 사람들은 기념품이 '실재성을 상실해 이야기 속에 꾸며내야만 존재하는 사건들의 흔적'이 되어주리라 믿는다.

"기념품은 갈망이라는 언어를 통해 원본의 맥락에 말을 건다. 기념품은 필요나 사용가치 때문에 생겨난 물건이 아니라 노스탤지어라는 충족될 길 없는 욕구에서 비롯되는 물건이기 때문이다."

'갈망에 대하여'를 읽느라 진을 뺐다. 나에게 책은 과제물처럼 성가셨다. 다른 책을 열어 확인해가며 읽어야 할 부분도 있었다. 이 책을 다 읽고 영양보충을 했다는 뿌듯한 감정 같은 것은 없다. 그런데… 특별한 체험이 없지는 않았다.

책이 어려워 '난삽한 책'이라는 누명을 씌워 던져버리고 싶은 순간이 있었다. 40쪽쯤 읽자 싫증이 났다. 그런데 43쪽을 지날 즈음 나는 행간 속에 빠져들어 책과 무관한 상상을 했다. 스튜어트는 여기서 손글씨와 일기에 대해 말하고 있다.

"손으로 글을 쓴다는 것은 (중략) 개인적인 부분과 직결된다. (중략) 목소리가 시간에 남기는 흔적이라면, 손글씨는 공간에 남기는 흔적이다. 자기 편지나 일기를 태우는 것에 도덕적 정당성이 있다면 (중략) 자살의 도덕적 정당성에 가까울 것이다. 그러나 나머지 다른 것들과 함께 한꺼번에 태울 수 없는 기록은 곧 기록될 수 없는 기록이다. 일기 속에서 헤아려 셀 수 없는 시간이 있다면 바로 일기를 쓰는 시간이다."

나는 이 책을 읽기 일주일 전에 용인에 계신 스승의 댁에 갔다가 만난 시인 윤제림을 떠올렸다. 그는 재킷 가슴주머니에 연필을 꽂고, 주머니에는 작은 공책을 넣고 있었다. 그는 "글을 쓰고 메모를 할 때 손글씨가 아니면 안 된다"고 했다. 나는 키보드가 익숙하다. huhball@

<수잔 스튜어트 지음/박경선 옮김/산처럼/2만2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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