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헌인 '긴급조치', 대통령이 하면 불법 아니다?
대법원 스스로 '위헌' 인정했는데…"대통령, 정치적 책임 뿐 국민 개인권리 법적의무 없어"
[아시아경제 류정민 기자] “긴급조치 9호는 헌법상 보장된 국민의 기본권을 지나치게 제한하거나 침해한 것으로 유신헌법은 물론 현행 헌법에도 위반돼 무효다.”
대법원은 2013년 4월18일 전원합의체 판결을 통해 이렇게 선고했다. 유신헌법에 담겨 있던 긴급조치 9호는 위헌이라는 얘기다.
긴급조치 9호는 대한민국 헌법(유신헌법)을 반대하거나 폐지를 주장하는 행위를 금지하고 이러한 내용을 방송하거나 보도하는 행위도 금지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긴급조치는 박정희 대통령 시절인 1970년대 차례로 선포됐고, 1975년 5월 긴급조치 9호가 선포됐다.
긴급조치는 한국 사회에서 대표적인 ‘악법’으로 평가받는 조치다. 국민 기본권을 옥죄는 등 헌법에 위반되는 요소가 적지 않기 때문이다. 긴급조치는 한국사회가 민주화되면서 ‘위헌’으로 결론났다.
헌법재판소가 긴급조치 1호, 2호, 9호에 대해 위헌 결정을 내렸고, 대법원 역시 전원합의체 판결을 통해 ‘위헌’이라는 판단을 내렸다. 적어도 법적인 판단으로 긴급조치는 국민 기본권을 옥죈 잘못된 조치라는 점이 명백해졌다.
그렇다면 대통령의 긴급조치권 행사는 민사상 불법행위로서 피해자에 대한 손해배상 책임을 지게 될까? 대법원은 26일 이러한 의문을 풀어주는 첫 번째 판결을 내놓았다.
결과는 의외였다. 상식과 정면으로 부딪히는 판단이었다. 대법원 스스로 긴급조치는 위헌이라고 판단했지만, 긴급조치를 대통령이 행사한 것은 불법행위로 보기 어렵다는 판단이었다.
어떻게 이런 결정이 나왔을까. 대법원 3부(주심 권순일 대법관)는 26일 최모씨가 국가를 상대로 낸 손해배상 소송의 상고심에서 “최씨에게 200만원을 지급하라”고 판결한 원심을 깨고 원고 패소취지로 사건을 대전지법에 돌려보냈다.
최씨는 1978년 서울대 재학 중 긴급조치 위반 혐의로 중앙정보부에 끌려가 영장 없이 20여일 동안 구금됐다. 최씨는 국가의 불법행위에 따른 피해를 봤다. 최씨는 대통령과 공무원의 불법 행위로 고통을 당했다며 국가를 상대로 소송을 냈다.
2심 재판부는 “긴급조치 9호의 내용은 유신헌법에 의하더라도 명백히 위헌”이라며 “긴급조치 9호를 발령한 대통령과 수사를 감행한 중정 소속 공무원들의 고의나 과실이 인정된다”고 판단했다. 국가의 손해배상 책임을 인정했다.
2심 재판부 판단은 대법원 전원합의체 결정 취지를 반영하는 내용이었다. 그런데 대법원은 2심 재판부 판단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당시 대통령이 행사했던 긴급조치권은 민사상 불법행위를 구성한다고 보기 어렵다는 판단이다.
대법원의 논리는 이런 내용을 담고 있었다.
대법원의 이러한 논리는 설득력을 지니고 있을까. 의문을 제기하는 이들도 있겠지만 결과는 이미 나왔다. 앞으로 대법원의 중요한 판례로서 활용될 것으로 보인다.
대법원 관계자는 “대통령의 긴급조치 발령행위 자체가 국가배상법상의 불법행위에 해당하는지에 관해 대법원이 판단한 첫 사례로서 의미가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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