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Dim영역

도심 속 아날로그 감성이 살아있는 옛마을 '감천'과 이바구길

스크랩 글자크기

글자크기 설정

닫기
인쇄 RSS

부산 산복도로 개통 50년

[아시아경제 이규성 기자] 부산 노포동 터미널에서 택시를 잡고, 기사에게 '산북도로'에 데려다 달라고 요청했다. 택시 기사는 "산복도로는 동서로 장장 40km나 늘어져 있어 구체적으로 말하지 않으면 갈 수가 없다"고 손사래를 쳤다. "산복도로를 둘러보러 왔다. 도로를 따라 죽 달리다 감천마을로 가보자."

그제서야 시동을 건 택시 기사는 "먼데서 온 것 같은데...왜 산복도로를 보러 가냐 ?"고 묻는다. 그러면서 "요즘은 산복도로변의 달동네를 보러오는 관광객이 많다"며 "사파리 관광도 아니고 가난한 동네 사람들이 무슨 구경거리냐"고 따졌다. 산복도로는 부두길, 광안대로 등과 더불어 부산의 주요 간선도로다. 산복도로는 부산 앞바다를 바라보고 있는 크고 작은 산비탈을 따라 동서로 길게 늘어진 도로로 1964년 개통됐다. 산복도로변에는 해방과 6·25전쟁을 거치면서 피난민들이 밀려들어 달동네를 이뤘다.
감천마을은 계단식 주거행태로, 뒷집을 가리지 않고 서로 나누며 사는 지혜가 엿보인다. 푸른 색 함석 루핑과 다양한 미술품으로 도서정비함으로써 옛 정취를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감천마을은 계단식 주거행태로, 뒷집을 가리지 않고 서로 나누며 사는 지혜가 엿보인다. 푸른 색 함석 루핑과 다양한 미술품으로 도서정비함으로써 옛 정취를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AD
원본보기 아이콘

10월이 끝나는 늦가을, 비가 뿌리는 감천마을에는 오전부터 사람들의 발길로 가득 차 서로 우산이 부딪치며 걸어야 했다. 마을버스 정류장인 감정초등학교 앞, '골목길을 누비는 물고기' 벽화 앞에는 외국 관광객들이 몰려 사진을 찍느라 북새통을 이뤘다. 말레이시아에서 온 직장여성들은 "마을 곳곳에 설치된 미술품과 옛 정취가 남아 있는 골목길 투어가 인상적"이라며 "초고층 빌딩 숲으로 이뤄진 해운대 일대보다 사람 사는 풍경을 만날 수 있어 좋다"고 말했다.
감천마을 관광길에 나선 말레이지아 여성들

감천마을 관광길에 나선 말레이지아 여성들

원본보기 아이콘

한국전쟁 이후 태극도인들이 집단이주하면서 형성된 감천마을은 부산의 대표적인 달동네다. 이곳은 2009년 생활환경개선사업과 공동체 예술사업이 동시에 펼쳐지면서 골목마다 미술품들로 가득 찬 문화마을로 변모했다. 주택 벽면이나 축대, 지붕에는 마을의 지형과 역사가 고스란히 묻어나는 미술품들이 관광객의 발길을 잡았다. 어느 집의 옥상 난간에는 새들이 푸른 하늘을 훨훨 날고 싶은 꿈을 담고 비상하기 직전의 모습이다. 또 마을 카페 지붕에도 가방을 멘 새들이 즐거운 소식을 전하러 온 듯 고단한 우리네 삶을 달래준다. 골목 안으로 들어서면 좁은 통로를 따라 여러 집들의 대문이 나오고, 골목이 교차하는 거리에서는 느티나무 아래 마을 정자가 나온다. 오솔길은 서로 엉켜 마치 미로 속을 걷는 듯 했다.
감천마을길 풍경

감천마을길 풍경

원본보기 아이콘

감천마을에서는 부산 앞바다가 한눈에 펼쳐진다. 푸른 색 함석 루핑으로 지붕을 이고, 올망졸망 머리를 맞댄 집들이 이색적인 풍경이다. 깎아지른 계단들이 마을에서 저 아래 고층들이 늘어선 도심 한복판을 향해 늘어져 있다. 골목에서는 마주 오는 사람이 있을라 치면 잠시 멈춰서는 여유도 있고, 서로 눈인사라도 나누게 된다. 그러면서도 초행자들은 미로 같은 작은 샛길들이 거미줄처럼 엉켜 있어 금세 길을 잃기 일쑤다. 정용문 한국관광공사 동남권지사장은 "감천문화마을사업이 전개된 이후 매일 1000명 이상의 관광객이 찾아오고 있다"며 "동남아시아 등 외국 관광객도 절반을 차지한다"고 말했다. 정 지사장은 또 "이곳은 도시재생에 있어서 전면적인 개발보다는 마을의 내력, 흔적, 공동체적 특성을 유지한 정비가 얼마나 효율적인 지를 보여준다"고 설명했다.
특히 감천마을은 옥녀봉에서 천마산에 이르는 산자락을 따라 질서정연하게 늘어선 계단식 집단주거 형태로 독특한 장소성을 표현한다. 어느 집도 뒷집을 가리지 않도록 지어진 주택은 그 자체가 삶의 미덕으로 다가온다. 또한 자연 지형을 활용, 나누며 살 부대끼며 사는 모습은 우리가 잃어버린 정서를 되새기게 한다. 이 동네에서는 투기판으로 변질된 재개발현장, 개발 만능에 찌든 우리들의 욕망이 드러난다. "왜 우리는 과거와 현재, 미래가 유전하는 도시를 만들려 하지 않았는가?"

본래 '녹색도시'란 개발을 늦추고, 환경과 사람을 조화시켜 지속가능한 공간을 이뤄간다는 의미일 수 있다. 성장과 개발의 뒤안길에서 왠지 모를 히스토리가 재생되고, 지나간 세월을 되돌려 오늘과 소통하려는 따뜻한 감성과 여유가 물씬하다. 아파트 일변도의 도심과 투기판으로 변질된 재개발지역과는 판이한 형태다. "바로 이런 게 녹색도시는 아닐까."

감천마을에서 볼거리는 수많은 미술작품과 옛 마을의 정취뿐만 아니라 다양한 마을기업, 협동조합, 각종 어울림터 등 커뮤니티 등도 포함된다. 언덕배기에 푸른 색채와 여러 꽃들로 장식된 마을기업 '감내카페'에는 오전부터 사람들이 따뜻한 차를 마시며 담소하는 모습도 보였다. 카페 주인은 "하루에 마을 사람을 포함, 관광객 200여명이 들른다"며 "현재 두 사람이 일하고 있지만 일손이 달려 주말에는 다섯 명이 일하기도 한다"고 말했다.
이처럼 마을이 정비되고, 사람들이 찾기 시작하면서 각종 아트숍, 카페, 맛집 등 마을기업이 생겨나고, 마을 안 골목 상점도 분주해졌다. 손병철 부산시 창조도시 기획과장은 "이곳에 각종 공방, 아트숍 등 마을기업 및 예술인의 작업장이 생겨나면서 천연염색, 스카프, 손수건, 티셔츠, 그림엽서, 각종 창작품을 비롯, 자생적인 생산품들이 늘어나 마을 주민의 자립기반이 되고 있다"고 설명했다. 그는 또 "이렇게 만들어진 일자리가 수백여 개가 넘을 정도로 모범적인 도시재생기법을 보여준다"고 덧붙였다. 이곳에선 마을을 배경으로 수많은 영화도 만들어졌다. '슈퍼스타 감사용'(2004), 히어로(2007), 그녀에게(2009), 카멜리아(2010), 네버엔딩 스토리(2010) 등의 주 무대도 바로 감천마을이다.

도시의 아날로그적 감성, 추억, 내력을 그대로 살리는 과거와 현재의 컬래버레이션은 도시 문화 DNA라는 걸 감천마을은 온 몸으로 가르쳐 준다. 또한 옛 것을 향유하고, 보존하고, 수리하고, 복원하는 것이 개발의 참뜻이라는 걸 일러준다.

감천마을을 벗어나 초량 이바구길에 도달하면 수많은 삶의 내력이 도시자원임을 알게 한다. 초량이바구길은 구봉산 아래 부산역~백제병원~초량초교~168계단~망양로로 이어지며 마을과 마을을 휘감고 돈다. 2011년 산복도로 르네상스가 시작된 이래 이바구길 안에선 우리가 기억해야할 이들의 삶이 되살아나고 있다.
장기려선생기념관 근처에서 만난 이바구길의 할머니들.

장기려선생기념관 근처에서 만난 이바구길의 할머니들.

원본보기 아이콘

이바구길 루핑집, 난간 사이 화분에 심긴 채소와 꽃들이 정겹다.

이바구길 루핑집, 난간 사이 화분에 심긴 채소와 꽃들이 정겹다.

원본보기 아이콘

그 중에서도 대표적인 이가 '한국의 슈바이처' 장기려 선생이다. 마을길을 굽이돌아 이바구길 내의 장기려기념관에 닿으면 그의 지극한 생애와 만날 수 있다. 장기려는 생전 청진기와 낡은 흰색 가운, 그리고 병자들을 돌봤던 나무 탁자와 걸상만 남기고, 평생 가난한 이들을 위해 인술을 펼치다 떠났다. 그 감동을 뒤로 하고 마을길로 나서자 기념관 옆에 마을 할머니 여럿이 '깔깔' 웃음을 터트리며 담소를 나누는 모습이 보였다. 할머니들은 "골목이 우리 놀이터"라며 "여기서 수십 년 동안 함께 살아서 매일같이 이렇게 골목에 나와 놀고, 얘기하다 해 지면 집에 들어간다"고 말했다. 그리고 골목길 한편에는 아주 작은 텃밭에서 배추와 무, 파 등 채소들이 정겨운 눈길을 건넸다.

좀 더 도로를 따라 올라가자 '유치환의 우체통'과 전망대가 나왔다. 한눈에 부산항과 부산역, 부산 앞바다가 내려다 보였다. 아마도 전쟁 통에 아버지들은 멀리 배 들어올라치면 지게를 지고 긴 골목길과 계단을 내려갔을 터다. 어둘 녘, 다시 골목길을 따라 귀가하는 아버지들의 모습도 선연하게 비춰왔다. 전망대에서는 여고생 십여 명이 마을버스를 기다리며 왁자하게 떠들고 있었다. 전망대 한편에는 빨간 우체통이 바다를 바라보고 있고, 기념관 안에는 유치환 시인의 시들이 가득 차 있다.

유치환은 생전 한 여인을 사모하여 5000여통의 편지를 쓴 시인이다. 그들은 서로 편지를 주고받으며 사랑을 나눴다는, 왠지 설화에나 있을법한 얘기의 주인공들이다. 유치환은 바로 인근 고등학교장으로 재직 중에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났다. 그들의 사랑은 사후에 알려져 많은 이들의 심금을 울렸다. 문득 누구에게라도 손편지 한통 띄우고 싶게 하는 곳이다. 도심 여행길, 아날로그적 감성이 그리운 사람이라면 부산 산복도로를 찾아볼 일이다.



이규성 기자 peace@asiae.co.kr
AD

<ⓒ투자가를 위한 경제콘텐츠 플랫폼, 아시아경제(www.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

함께 본 뉴스

새로보기

이슈 PICK

  • 6년 만에 솔로 데뷔…(여자)아이들 우기, 앨범 선주문 50만장 "편파방송으로 명예훼손" 어트랙트, SBS '그알' 제작진 고소 강릉 해안도로에 정체모를 빨간색 외제차…"여기서 사진 찍으라고?"

    #국내이슈

  • "죽음이 아니라 자유 위한 것"…전신마비 변호사 페루서 첫 안락사 "푸바오 잘 지내요" 영상 또 공개…공식 데뷔 빨라지나 대학 나온 미모의 26세 女 "돼지 키우며 월 114만원 벌지만 행복"

    #해외이슈

  • [포토] 정교한 3D 프린팅의 세계 [포토] '그날의 기억' [이미지 다이어리] 그곳에 목련이 필 줄 알았다.

    #포토PICK

  • "쓰임새는 고객이 정한다" 현대차가 제시하는 미래 상용차 미리보니 매끈한 뒤태로 600㎞ 달린다…쿠페형 폴스타4 6월 출시 마지막 V10 내연기관 람보르기니…'우라칸STJ' 출시

    #CAR라이프

  • [뉴스속 용어]뉴스페이스 신호탄, '초소형 군집위성' [뉴스속 용어]日 정치인 '야스쿠니신사' 집단 참배…한·중 항의 [뉴스속 용어]'비흡연 세대 법'으로 들끓는 영국 사회

    #뉴스속OO

간격처리를 위한 class

많이 본 뉴스 !가장 많이 읽힌 뉴스를 제공합니다. 집계 기준에 따라 최대 3일 전 기사까지 제공될 수 있습니다.

top버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