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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블로그]슬픈 창조경제의 점심을 먹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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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경제 정종오 기자]대학 교정은 가을색깔로 익었다. 바람은 가지를 흔들 정도로 솔솔 불었다. 가을비가 나뭇잎으로 떨어져 작은 소리를 냈다. 단풍이 울긋불긋 산을 물들였다. 어디선가 '툭'하고 낙엽 하나가 발언저리에 나뒹굴었다. 한 대학 교수를 만나기 위해 길을 나섰다. 구내식당에서 만나기로 했다. 연구하느라 바빠 바깥으로 나올 짬이 없단다. 약속 장소인 교수식당으로 가기 위해 교정을 10분 정도 걸었다. 대학을 졸업한지도 벌써 20년. 많이 변했다. 교정에는 새 건물이 들어섰다. 세월은 그렇게 흘렀다. 강산이 두 번이나 바뀌었으니.

오늘 만나는 A 교수는 국내 과학 분야에서 굵직한 연구로 주목을 받고 있는 교수 중 한 명이다. 자리에 앉자마자 A 교수의 말이 가슴에 내려앉는다.
"과학자에게 가장 어려운 게 뭔지 아느냐? 연구 결과를 성과물(생산품)로 내놓는 것이 진짜 어렵다. 연구 논문 쓰는 게 훨씬 쉽다."

세계적 학술지인 네이처와 사이언스 등에 논문을 발표하는 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생산품을 내놓는 것보다 그게 더 쉽다니 뭔가 이유가 있을 것 같았다. 대구탕을 먹으면서 그의 이야기를 들었다. 얼마 전 그의 연구팀이 내놓은 논문이 언론에 비중 있게 보도된 적이 있다. 최첨단과 의료 과학을 접목한 획기적 연구 논문이었다. 전 세계적으로도 주목받았다.

청와대에서 이 기사를 보고 곧바로 호출이 왔다. 창조경제의 좋은 사례라는 의견이었다. 만나고 싶다고 했다. 연구팀은 미래창조과학부와 청와대 관계자를 잇달아 만났다. 청와대는 연구팀에게 "상당히 의미 있고 좋은 연구 결과"라고 치켜세운 뒤 성과물은 언제쯤 나올 수 있는지 물었다. 청와대 관계자는 필요한 모든 것은 지원하겠다는 말도 잊지 않았다.
대구탕을 먹는 둥 마는 둥 수저를 내려놓으며 A 교수가 말을 이었다. A 교수는 "청와대에 분명히 말했다"며 "필요한 모든 것을 지원해 주겠다는 것은 좋은데 모든 것은 과학자에게 맡겨 달라"고 부탁했단다. A 교수는 청와대 관계자에게 "정권이 끝나기 전에 성과물을 무조건 만들어내라는 말만 하지 않는다면 그것이 우리를 진심으로 도와주는 길"이라고 말했단다.

창조경제. 박근혜정부의 가장 큰 테마 중 하나이다. 미래부는 내년에 팔을 걷어붙인다. 이석준 미래부 1차관은 지난 9월 내년도 미래부 예산 관련 브리핑에서 "올해가 창조경제의 초석을 다졌다면 내년에는 성장과 성과를 낼 것"이라고 말했다. 미래부 예산안 보도자료 중 '창조경제'라는 키워드가 무려 38번이나 나온다. 한 문장에 한 번씩 언급될 정도이다. 올해 7조1000억원 창조경제 예산은 내년에 8조3000억원으로 대폭 늘었다.

문제는 성과위주의 '숫자놀음'에 있다. A 교수는 청와대에 '정권 내에 성과물을 무조건 내겠다는 욕심을 버려야 한다'고 조언했다. 과학과 창조경제가 '숫자놀음'에 매몰되는 순간, 설익은 성과물이 나온다. 독이 된다. 창조경제가 제자리를 잡기 위해서는 숫자놀음에서 벗어나는 장기적 안목이 필요하다. 점심을 먹고 난 뒤 A 교수는 다시 자신의 연구실로 향했다. 자신이 있을 곳은 그곳이라고 말한 뒤.






정종오 기자 ikokid@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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