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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에서도 스톡홀름 신드롬이 나타난 대표적인 사건이 있다. 허스트 납치사건이다. 1974년 4월 미국 샌프란시스코의 하이버니아 은행에 일명 공생해방군(SLA)이라 불리는 과격 도시게릴라단체 조직원 5명이 침입한다. 하지만 조직원 중에 하나는 두달전 SLA에 납치된 신문왕 윌리엄 허스트의 손녀이자 언론재벌 허스트 가문의 유일한 상속녀 패티 허스트로 판명됐다.
감시카메라에 찍힌 그녀는 아무렇지도 않게 전투복을 입고 기관총을 들었다. 침입자들 만큼이나 적극적이었다. 패티의 부모는 그녀를 석방시키기 위해 SLA의 요구에 따라 200만달러어치의 음식을 빈자들에게 나눠 주고 자신들이 소유한 신문에 SLA의 광고도 실었다. 하지만 그녀는 돌아오기는커녕 무장강도들과 어울려 다녔다.
우리나라에서도 스톡홀름 신드롬과 비슷한 현상이 최근 일어났다. 22사단 일반전초(GOP) 총기 난사 사건의 범인으로 지목된 임모 병장에 대한 네티즌들의 댓글이 대표적이다. 사건발생 일주일 후부터 온라인에서는 임 병장을 왕따 피해자로 규정하며 동정하는 글이 올라오기 시작했다. 여기에는 임 병장 변호인단 측으로부터 여과없이 흘러나온 이야기도 덧붙여졌다.
이들 세가지 사건에서 스톡홀름 신드롬이 나타나게 된 배경은 '니탓 내탓'에서부터다. 아무리 부정당한 일을 저질러도 당신 탓에 내가 이렇게 밖에 될 수 없었다는 주장이 밑바탕이 된다는 것이다. 스웨덴 은행 인질강도 사건의 원인은 사회 탓에, SLA는 납치범들은 부유층들의 잘못된 삶 탓에 기관총을 잡을 수 밖에 없다는 논리가 깔려있다.
임 병장을 옹호하는 댓글도 왕따를 시킨 전우들 탓에 임병장이 사고를 저지를 수 밖에 없었다는 논리를 내세우고 있다. 결국 니탓 내탓만 따지다 가해자와 피해자가 혼동되는 결론을 만들어낸 셈이다.
임 병장의 진술과 변호인단에서 흘러나온 이야기가 맞다고 하더라도 사망자 5명과 부상 7명을 만들어낸 임 병장의 행위가 정당하다고 말할 수 있을까. '제2의 임 병장'이 나오지 않으려면 군의 솔직한 태도와 철저한 원인규명도 필요하지만 니탓 내탓만 하다 피해자와 가해자를 뒤바꾸는 일부 여론도 없어져야 한다. 나도 가해자에서 피해자로 바뀔 수 있다는 안이한 생각을 할 때 또 다른 임병장이 나올 수 있기 때문이다.
양낙규 기자 if@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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