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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ok]홀로코스트 후 70년…생존자가 죄책감에 시달리는 아이러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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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리모 레비의 마지막 유서와도 같은 작품 '가라앉은 자와 구조된 자'

가라앉은 자와 구조된 자

가라앉은 자와 구조된 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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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경제 조민서 기자]올 초 독일 검찰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자행된 살인행위의 공범으로 당시 수용소 경비원으로 일했던 10여명을 기소했다. 또 1944년 노역 부적합 판정을 받은 1721명을 가스실에서 대량 살상하는데 가담한 올해 93세의 나치 전범 용의자 한 명도 체포했다. 독일에서 최근 들어 나치 전범들에 대한 수사에 속도를 높이고 있는 까닭은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판단에서다. 당시 나치 수용소 근무자 가운데 제일 어린 축에 속했던 사람들도 이제는 80대의 고령에 들어선 만큼, 더 늦기 전에 이들이 법의 심판을 받도록 촌각을 다투는 것이다.

하지만 여기서 한 가지 의문이 생긴다. 인류 역사상 가장 끔찍하고도 잔인한 기억인 '홀로코스트(유대인 대학살)'에 가담한 사람들은 지난 70여년의 세월을 어떻게 보냈을까. 죄책감에 시달렸을까, 아니면 기억을 지우고 전쟁 후의 일상에 집중했을까. 확실한 것은 홀로코스트의 생존자들은 그 떨쳐낼 수 없는 악몽에 시달리면서 오히려 죄책감과 수치심을 느꼈다는 것이다. 여기서 죄책감은 "체제에 대항해서 아무것도 하지 않았거나 충분히 하지 않았다"는 자괴감에서 오는 것이며, 수치심은 "자신이 누군가의 자리를 빼앗고 살아남은 게 아닐까"하는 의심에서 나온 것이다. 가해자는 쉽게 잊고, 피해자는 되려 고통에 시달리는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살아서도 '기억'과의 힘겨운 싸움을 벌이고 있는 생존자들의 모습은 프리모 레비(1919-1987)의 '가라앉은 자와 구조된 자'에서 생생하게 전해진다. 프리모 레비는 아우슈비츠 생존 작가로, '이것이 인간인가'를 통해 폴란드 아우슈비츠 제3수용소에서 보낸 열 달간의 체험을 세상에 알렸으며, 시집 '살아남은 자의 아픔'을 통해서는 '타인의 고통은 나의 고통이다'라며 절절한 분노와 절망을 드러냈다. 1943년 파시즘에 저항하는 레지스탕스 운동을 하다가 체포돼 아우슈비츠 강제수용소로 끌려간 레비는 1945년 그곳에서 기적적으로 살아남아 고향으로 돌아왔다. '가라앉은 자와 구조된 자'는 레비가 수용소에서 풀려난 지 40년 만에 쓴 책으로, 강제수용소 안에서 벌어졌던 현상을 통해 나치의 폭력성, 권력 관계의 문제 등을 날카롭게 파헤친다.

프리모 레비가 가장 경계하는 것은 '아우슈비츠'를 기억 혹은 기록하지 않으려고 하는 모든 행위다. "너희 중 아무도 살아남아 증언하지 못할 것이며, 혹시 누군가 살아 나간다 하더라도 세상이 그를 믿어주지 않을 것"이라는 나치 친위대 군인들의 자신만만한 경고가 현실이 되는 것이야말로 그가 우려한 가장 끔찍한 사태다. 실제로 강제수용소의 모든 문서들은 전쟁 마지막 며칠 동안 모두 불살라져 "희생자들의 수가 400만이었는지, 600만이었는지, 800만이었는지" 오늘날에도 논란만 계속되고 있다.

"라거(강제수용소)에 대한 진실을 확산시키지 않았다는 것이야말로 독일 민족이 저지른 가장 중대한 집단 범죄의 하나이며, 히틀러의 테러로 인해 독일 민족이 다다른 비겁함을 가장 명백하게 증명해주는 것이다. 관습 속으로 들어와버린 비겁함, 너무나 깊어서 남편이 아내에게, 부모가 자식에게도 입을 열지 못하게 만드는 비겁함이다. 이 비겁함이 없었더라면 그토록 극단으로 치닫지는 않았을 것이고 유럽과 세상은 오늘날 달라져 있을 것이다."
이 책에서 가장 논란이 된 부분은 2장 '회색지대'다. 흔히들 수용소를 '나치'라는 가해자와 '유대인'이라는 희생자로 크게 구분지어 생각하지만, 레비는 희생자들 수용소 포로들 내부에서조차 권력관계가 형성되는 현상을 관찰했다. 신입 포로들에 대한 최초의 폭력은 특권을 지닌 동료 포로로부터 시작됐다. 이들은 '최종해결책(가스실)'에서 벗어나기 위해, 혹은 죽 한 그릇을 더 먹기 위해 당국에 협력하고 크고 작은 특권을 손에 쥐었다. 이 특권층 포로는 포로소 전체 인구에서는 소수였지만, 생존자들 가운데서는 압도적인 다수를 차지했다. 후에 생환자들이 당시의 기억에 대해 입을 닫고 있는 이유도 자신의 이중성이 드러날 것을 두려워해서다. 레비는 이들을 '회색인간'이라고 부르며 "체제 자체의 범죄성을 정확하게 이해하고, 선악의 이분법으로 갈라낼 수 없는 보통 사람들이 억압기구의 범죄에 의해 가담자나 공범죄가 되는 현상"에 절망한다.

포로들에게 최대한의 괴로움을 짜내려는 나치의 폭력성, 나보다 더 관대하고 현명하고 쓸모있는 사람 대신에 살아남았다는 수치심, 진실을 직면하기를 거부하는 세상 등 아우슈비츠를 둘러싼 모든 것들이 레비를 좌절하고 절망하게 했다. 책 제목 '가라앉은 자와 구조된 자'는 단테의 '신곡'의 지옥 편에서 뽑았다. '가라앉은 자'는 수용소에서 목숨을 잃은 "완전한 증인"들을 의미한다. '구조된 자'들은 그들 대신 증언해야 할 의무가 있지만, 레비는 결국 "홀로코스트의 가르침이 역사의 일반적인 잔혹한 사건들 가운데 하나로 그렇게 잊힐 것"이라는 슬픈 예감에 사로잡힌다. 어찔할 수 없는 열패감에 시달린 채 레비는 1987년 4월, 자살로 생을 마감한다. 그의 유서와도 같은 이 작품은 오늘에서야 국내에서 처음으로 소개가 됐다. 살아남은 자들이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기억하고, 잊지 않는 것'이라는 그의 메시지는 오늘날에도 유효하다.

(가라앉은 자와 구조된 자 / 프리모 레비 / 돌베개 / 1만3000원)




조민서 기자 summer@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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