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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후기] ‘13일의 금요일’, 최후의 만찬은 물고문

최종수정 2014.04.05 10:00 기사입력 2014.04.05 1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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故 김근태, 다시 법정에 서다…남영동 ‘고문’, 쓰라린 역사의 흔적들

[아시아경제 류정민 기자]“아쉽죠. 살아생전에 진실을 밝혔으면 했는데….”

4월3일 오후 서울고등법원 302호 앞. 인재근 새정치민주연합 의원은 남편 김근태 전 열린우리당 의장의 재심 첫 공판을 마친 소감을 이렇게 말했다. 담담하게 말을 이었지만 마음은 복잡할 수밖에 없다.
故 김근태 의장은 생전에 법정에서 명예회복을 이루지 못했다. 그는 1986년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대법원에서 징역 5년, 자격정지 5년을 확정판결 받았다. 법적으로 그는 유죄를 선고받았던 인물이다.

하지만 가혹행위에 의한 진술이어서 증거능력에 의문이 들 수밖에 없었다. 그는 세상을 떠났지만, 1986년 판결이 정당했는지는 의문이 남아 있다. 법원이 재심을 허용하면서 ‘김근태 고문사건’은 다시 사법부 판단을 받게 됐다.

‘김근태 고문사건(민주화운동청년연합 사건)’ 재심이 중요한 이유는 한국사회 쓰라린 과거가 고스란히 녹아있는 사건이기 때문이다. 역사의 교훈이 남아 있다는 얘기다.
청사 5층의 조사실 복도. 이곳의 15개 조사실에선 가혹한 고문과 취조가 자행됐다.

청사 5층의 조사실 복도. 이곳의 15개 조사실에선 가혹한 고문과 취조가 자행됐다.


1985년 서울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일어났던 ‘김근태 고문사건’은 한국사회가 역사를 제대로 기억하고 과거의 잘못을 반성하고 있는지 살피는 기준점이 될 수 있다.

언론자유가 당연한 권리처럼 느껴지고 인권이 존중돼야 할 가치라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세상에 당연한 것은 없다. 얼마나 많은 사람이 거리에서 눈물과 피를 흘리며 ‘민주주의’, 그 가치를 얻어내고자 노력했는지 모른다.

물론 모든 사람이 거리에 나와 민주주의를 외칠 수는 없다. 누군가는 나서고 다른 누군가는 그를 응원할 수 있다. 맨 앞에 서 있는 사람은 다칠 수 있다. 어쩌면 목숨을 잃을 수도 있다. 두려움이 앞설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맨 앞에 서서 국민 누구나 누려야 할 권리를 얻어내고자 노력한 이들이 있다. 김근태 의장을 ‘영원한 민주주의자’로 부르는 이유는 한국사회 민주주의가 뿌리 내리는 데 큰 역할을 했던 그의 이력 때문이다.

하지만 그는 세상에 없다. 일찍 세상을 떠났다. 2011년 12월30일, 향년 64세라는 많지 않은 나이로 세상을 등졌다. 고문 후유증이 심해져 더는 버티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김근태 의장이 세상을 떠났을 때 진보와 보수 할 것 없이 그의 죽음을 애도했다. 동아일보는 12월31일자 1면에 <민주화의 아름다운 별이 지다>라는 기사를 실었다. 조선일보는 이날 21면에 <민주화운동의 代父·신사 정치의 상징을 잃다>라는 기사를 내보냈다.

64세라는 많지 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나게 한 원인, 남영동 대공분실에서는 어떤 일이 있었을까. 서울고법 형사2부가 ‘김근태 고문사건’ 재심 결정을 하게 된 배경은 재심대상판결 ‘결정문’에 담겨 있다.

영화 '남영동 1985'의 한 장면

영화 '남영동 1985'의 한 장면


1985년 9월4일
“팬티만 입은 알몸으로 만들고 눈을 밴드로 가린 다음, 각목 4~5개로 만들어진 높이가 세면대보다 약간 높은 1미터 정도의 대에 담요를 깔고 김근태를 눕히고 담요를 말아 몸을 감싼 후 결박하고 얼굴 위에 두꺼운 수건을 덮어씌운 다음 주전자 및 샤워기로 얼굴 위에 물을 부어서 호흡 곤란 등으로 고통을 받게 하는 방법으로 폭행을 가했다.”

1985년 9월5일
“팬티까지 벗은 알몸으로 고문대 위에 눕게 해 결박한 다음 가슴과 사타구니 및 발등에 물을 뿌리고 김근태 발가락 부위에 전기도선을 연결해 붕대로 감은 다음 처음에는 짧고 약하게 전류를 흘려보내다가 점점 길고 강하게 전류를 흘려보내 극심한 통증을 느끼게 하는 방법으로 폭행을 가했다.”

영화 속 얘기가 아니다. 고문 등 폭행을 가한 혐의로 사법경찰관들이 대법원에서 유죄를 확정받은 사건의 ‘범죄사실’ 내용이다. 김근태 의장은 당시 트라우마 때문에 치과치료도 제대로 받지 못했다. 그곳에 누워 있으면 과거 고문을 받았던 것과 같은 느낌을 받았기 때문이다.

누군가를 심판하고 응징하기 위해서만 당시 역사를 기억해야 하는 게 아니다. 과거의 잘못을 반복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역사를 알아야 한다. 인재근 의원은 3일 재심 첫 공판을 지켜보며 “김근태 의장이 오랏줄에 묶여서 앉아 있는 느낌이었다”고 말했다.

당사자는 물론 가족도 당시의 기억을 떠올리는 것은 힘겨운 일이다. “하늘엔 조각구름 떠 있고 강물엔 유람선이 떠 있고 저마다 누려야 할 행복이 언제나 자유로운 곳”이라는 유행가가 울려 퍼지던 1980년대, 남영동 그곳에서는 이런 일이 있었다.

“오늘이 금요일이고 13일이다. 최후의 만찬일이니 각오하라.”

1985년 9월13일, 당시 치안본부 소속 경찰관들은 그런 말과 함께 다시 물고문과 전기고문을 시작했다. 당시 남영동 밀실에 울려 퍼졌던 비명소리는 그곳 어딘가에 여전히 남아 있을지도 모른다. 후대가 기억하도록 기나긴 울림으로….

류정민 기자 jmryu@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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