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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대통령 '북에 핵포기'강조… 왜

최종수정 2014.03.01 12:30 기사입력 2014.03.01 12: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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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경제 양낙규 기자]박근혜 대통령의 취임후 두 번째인 올해 3ㆍ1절기념사는 북한에 보내는 메시지가 담겨있다. 북한을 향해서는 이산가족 상봉을 계기로 보다 더 진전된 신뢰를 쌓아가 '평화 통일'을 이룩하자는 메시지에 방점을 두면서도 북핵 포기가 중요하다는 점을 거듭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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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 대통령은 기념사에서 "통일된 한반도는 유라시아와 동북아를 연결하는 평화의 심장이 될 것"이라며 "이런 열매를 맺기 위해서는 북한이 핵을 포기해야 한다"는 점을 지난해에 이어 올해도 거듭 강조했다.

"평화와 협력의 새 시대로 가는 길목에서 북한이 핵을 내려놓고 남북 공동발전과 평화의 길을 선택할 것을 촉구한다"는 박 대통령의 발언은 '핵포기가 평화ㆍ협력으로 가는 가장 중요한 조건'이라는 기본 인식을 그대로 보여주는 것으로 해석된다.

박 대통령이 북핵을 언급한 것은 북한의 개발노력이 계속되고 있기 때문이다. 북한은 6ㆍ25전쟁 직후 핵능력을 과시하기 위한 작업이 시작됐다. 1953년 정전협정으로 '무력통일'의 꿈을 이루지 못한 북한 김일성 주석은 전쟁이 끝난 직후부터 핵개발에 관심을 두고 전문인력 양성을 시작했다. 1955년 김일성종합대학 물리학부에 핵물리강좌를 개설했고 다음해 과학원에 핵물리실험실을 신설했으며 1965년 소련의 협조로 영변에 연구용 원자로를 건설했다.
북한은 1980년대까지는 원자력 기초교육과 연구에 초점을 맞추며 박천과 평산, 선천 등에 우라늄광산과 가공시설을 마련하는 등 기본시설 구축에 주력했다. 핵개발에 대한 북한의 이러한 남다른 애착은 매장량이 2600만t, 가채량은 약 400만t으로 추산될 정도로 풍부하게 보유하고 있는 우라늄에서 시작했다고 할 수 있다. 다른 나라보다 많은 우라늄을 경제발전의 동력으로 활용하겠다는 의도인 셈이다.

그러나 북한은 원자력발전소 등 핵의 평화적 이용보다는 핵무기에 관심을 두면서 국제사회의 골칫거리가 됐다.

북한은 1986년 1월부터 5MW급 원자로를 흑연감속로 방식으로 가동했지만, 국제사회의 압력으로 1989년께 원자로 가동을 중단했다. 원자로 가동 중단에 이어 북한은 1992년에는 한국과 '한반도 비핵화 공동선언'을 채택했으나 이듬해 국제원자력기구(IAEA)의 영변 특별사찰 요구에 핵무기확산금지조약(NPT) 탈퇴로 맞섰다.

1993년 6월 북미 공동성명을 통해 NPT 탈퇴를 유보했던 북한은 1994년 이뤄진 북미 제네바합의로 주요 핵시설을 동결했다. 당시 제네바 합의는 북한이 핵무기 개발을 중단하는 대신 미국이 북한에 2천MWe 경수로 원자로를 건설해 주기로 했다.

하지만 2002년 10월 고농축우라늄(HEU) 개발의혹이 불거지고 미국의 압박이 가중되자 2003년 1월 끝내 NPT에서 탈퇴하고 영변 원자로를 재가동했고 북미 제네바 합의는 휴짓조각이 되고 말았다.

이후 북한은 2005년 2월 자위를 위해 핵무기를 만들었다고 선언했고 그해 5월에는 영변의 5MW급 원자로에서 폐연료봉 8000개를 인출하는 작업이 완료됐다고 발표했다. 이만한 양의 폐연료봉을 재처리할 경우 무기급 플루토늄 24∼32㎏을 추출해 3∼5개의 핵무기를 제조할 수 있는 것으로 추산된다.

핵무기 보유를 선언한 다음해인 2006년 10월9일 북한은 함경북도 길주군 풍계리지하에서 처음으로 플루토늄 방식의 핵무기를 실험했으며 2009년 5월25일에는 같은 방식으로 제2차 핵실험을 감행했다. 1차 핵실험의 폭발력은 1킬로톤(ktㆍTNT 폭약 1000t의 폭발력)이었고 2차 핵실험은 2∼6kt가량으로 추정됐다.

2006년 북한의 1차 핵실험 폭발력은 1킬로톤(㏏)이었다. 2009년 2차 핵실험은 2∼6kt 가량으로 추정됐다. 2차 핵실험 당시 인공지진의 강도가 리히터 규모 4.4에 달해 10kt 이상이었을 것으로 보는 시각도 있었다. 1kt은 TNT 폭약 1000t의 폭발력과 맞먹는다. 히로시마에 투하된 핵폭탄의 위력이 15kt 가량 이었던 것을 감안하면 엄청난 폭발력이다. 북한은 내폭형 장치를 집중적으로 개발해 1980년대 후반부터 100여 차례 이상의 고폭실험을 했고 실제 핵실험을 통해 위력을 높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핵무기 제조도 그동안의 시험을 통해 어느정도 기술력을 보유한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2006년 10월 9일과 2009년 5월 25일에 각각 진행된 1차와 2차 핵실험은 플루토늄 방식으로 진행됐다. 1차 핵실험 당시 지진파는 3.6로 감지됐으며 2차 핵실험은 4.5로 감지됐다. 이번 지진파는 4.9 규모로 위력이 더 강해졌다.

하지만 수소폭탄 직전단계인 증폭핵분열탄(boosted fission weapon)으로 판단하기에는 진도가 약하다. 국방부 김민석 대변인은 "이번 핵실험의 폭발력은 6~7kt(킬로톤ㆍTNT폭약 1000t의 위력에 해당) 규모에 해당한다"며"당초 예상했던 수소폭탄의 전 단계인 증폭핵분열탄으로 보기는 어렵다"고 평가했다.

군당국이 증폭핵분열탄에 관심을 갖는 것은 북한이 증폭핵분열탄 실험에 성공할 경우 핵무기 중량을 1t 이하로 줄여 스커드ㆍ노동미사일 탑재가 가능할 것으로 보기 때문이다. 인도도 지난 1974년 1차 핵실험에 이어 98년 2차 핵실험을 실시한 뒤 핵무기를 소형화했다. 파키스탄도 80년대 중반에 핵물질을 뺀 핵폭발장치 폭발실험을 20여회 실시했다. 이를 기초로 98년 핵실험에서 핵무기 소형화에 성공했다.

만약 북한이 이번 핵실험으로 지금까지 개발한 장거리 로켓에 장착할 수 있는 핵탄두를 탑재할 수 있는 기술을 손에 넣었다면 북한은 이제 세계에서 열 손가락 안에 꼽히는 핵미사일 보유국이 되는 셈이다. 핵보유국으로 인정받기 위해 결국 핵실험을 통한 소형화 과정을 다시 진행할 것이란 주장도 나온다.

지난해 11월 백승주 국방부 차관은 국회에서 새누리당 북핵안보전략특위 회의에 참석해 "함경북도 길주군 풍계리 핵실험장의 남쪽 갱도는 언제든 핵실험을 할 여건이 돼 있다"고 보고했다.


양낙규 기자 if@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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