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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저詩]황지우의 '어느 날 나는 흐린 주점에 앉아 있을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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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경을 막 시작한 딸아이, 이젠 내가 껴안아줄 수도 없고/생이 끔찍해졌다/딸의 일기를 이젠 훔쳐볼 수도 없게 되었다/눈빛만 형형한 아프리카 기민들 사진;/"사랑의 빵을 나눕시다"라는 포스터 밑에 전가족의 성금란을/표시해놓은 아이의 방을 나와 나는/바깥을 거닌다, 바깥;/누군가 늘 나를 보고 있다는 생각 때문에/사람들을 피해 다니는 버릇이 언제부터 생겼는지 모르겠다/옷걸이에서 떨어지는 옷처럼/그 자리에서 그만 허물어져버리고 싶은 생;/뚱뚱한 가죽부대에 담긴 내가, 어색해서, 견딜 수 없다/글쎄, 슬픔처럼 상스러운 것이 또 있을까//그러므로, 어느 날 나는 흐린 주점에 혼자 앉아 있을 것이다/완전히 늙어 편안해진 가죽부대를 걸치고/등뒤로 시끄러운 잡담을 담담하게 들어주면서/먼 눈으로 술잔이 수위만을 아깝게 바라볼 것이다//문제는 그런 아름다운 폐인을 내 자신이/견딜 수 있는가, 이리라

황지우의 '어느 날 나는 흐린 주점에 앉아 있을 거다'


■ '내 딸 속에서 펼쳐지고 있는 나의 내생(來生)'을 다시 생각한다. 황지우도 그렇겠지만 나 또한 내 딸이 나의 다음 생(生)이다. 나는 내생이 론칭하기 위한 마중물같은 존재다. 나는 점점 더 필요없어져야 하고, 점점 더 필요없어져야 하는 생을, 납득하고 결재해야 한다. 딸이 아름다워질 수록, 생의 중심에 들어올 수록, 나는 밀려나는 바깥이 된다. 내생과 동거하는 사람, 혹은 전생과도 동거하는 사람. 나는 겹쳐진 원들의 교집합을 바라본다. 한쪽은 너무 낡았고 한쪽은 너무 새로워, 모두 내것이 아닌 듯 낯설다. 곧 전생은 희미해지고 내생은 또렷해올 것이지만, 문제는 그럴 때 아름다운 폐인을 내 자신이 견딜 수 있는가, 이리라.





빈섬 이상국 편집부장ㆍ시인 isomi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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