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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명훈칼럼]탈주범의 마술과 원전 패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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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4년 런던. 수많은 관중의 눈이 탈출 마술사 해리 후디니가 불가능에 도전하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는 역사상 가장 견고한 수갑을 푸는 묘기를 보여 주겠다고 공언했다. 전문가들은 고개를 저었다. 버밍엄의 기술자가 5년에 걸쳐 제조한 6개의 자물쇠가 달린 수갑을 보면서 "불가능하다"고 단언했다.

후디니의 손목에 수갑이 채워졌다. 그는 천천히 검은 상자 속으로 들어갔다. 여기저기서 실패한 것 아니냐는 수군거림이 들려오기 시작했을 때, 드디어 그가 모습을 드러냈다. 한 손에는 자물쇠를 풀어 버린 수갑을 치켜들고서. 감탄과 함성이 쏟아졌다. 후디니는 그 튼튼한 수갑을 어떻게 풀었을까. 오늘까지도 여전히 미스터리로 남아 있다.
한 세기를 훌쩍 뛰어넘어 한국에서 후디니를 무색게 하는 탈출 마술이 벌어졌다. 감시 소홀을 틈타 수갑을 찬 채 44초 만에 바람처럼 사라진 탈주범 이대우. 검찰 CCTV는 그의 손목에 채워진 수갑을 생생하게 보여 주었다. 잠시 후 CCTV에서 그는 두 팔을 휘저으며 거리를 활보하고 있었다. 한 방송은 '이대우는 수갑을 어떻게 풀었을까'라는 특별 프로그램까지 제작했다. 마술사와 자물쇠 전문가까지 동원한 TV에서 시청자가 확인한 것은 세 줄 톱날로 만들어진 한국제 수갑은 세계 최강이며 열쇠 없이는 무엇으로도 풀 수 없다는 사실이었다.

이대우가 동에 번쩍, 서에 번쩍할 즈음 또 다른 기막힌 마술이 등장했다. 패거리를 이룬 마술사들이 가짜ㆍ짝퉁ㆍ중고부품을 거대한 원자력 발전소에 끼워 넣었다. 부품 시험성적표는 순식간에 불합격에서 합격으로 둔갑시켰다. 신기하게도 원전은 돌았다. 5000만 국민의 생명을 담보로 한 대담한 마술 쇼였다.

탈주범의 활보와 원전 비리에 모두들 놀랐지만 반응은 달랐다. 전과 12범 이대우는 무섭다. 그의 출몰은 불안하다. 하지만 그를 향해 '왜 그랬느냐'고 따지지는 않는다. 비난은 그에게 도망갈 기회를 준 수사 당국에 쏠린다. 원전 비리로 가면 불안을 넘어 분노가 끓는다. 책임이 없지 않은 정부 인사까지 최상급 분노를 쏟아 낸다. 대통령은 "용서받지 못할 일"이라 했고 국무총리는 "천인공노할 범죄"라 말했다.
탈주범의 준동에 떨면서도 왜 그에게 비난의 화살을 쏘지 않는가. 반면 원전 비리에는 왜 공분하는가. 이유는 단순하다. 탈주범 이대우에게는 기대치가 없었다. 기회만 생기면 도주할 단순 범죄자일 뿐이다. 원전은 어떤가. 좋은 학력, 번듯한 직장에 전문성까지 겸비한 멀쩡한 자들이 공모해 비리를 저질렀다. 원전이 어떤 곳인지 누구보다 잘 아는 그들이다. 직업적 윤리와 전문가적 자존심을 주문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니 그들이 저지른 범죄가 주는 충격과 배신감은 클 수밖에 없다.

그들은 왜 쉽게, 반복적으로 국민을 배반했을까. 도덕성을 허문 단초는 한통속으로 엮여 죄의식까지도 나눠 갖게 된 패밀리 문화다. 특정 학맥을 끈으로 원청과 하청, 부품과 검증기관의 요직에 포진해 끈끈한 유착 관계를 맺어 왔다. 그들은 선수이자 심판이었다.

끼리끼리 뭉치는 그들만의 패밀리 문화는 한국적 권력이 된 지 오래다. 사회를 흔들고 독점과 차별, 부패와 부정의 온상이 되었다. 어디 원전뿐인가. 정치권, 행정부에서 산업, 교육, 문화, 체육계에 이르기까지 곳곳에 끼리끼리와 패밀리가 똬리를 틀고 있다. 모피아, 금피아, 친노ㆍ이ㆍ박, 고소영, 성시경, 인수위 동지로 또는 학연, 지연, 혈연을 엮어서… 속속 금융 수장을 꿰차고 있는 모피아의 요즘 활약상을 보라. 지금 이 순간에도 보통 사람들이 깜짝 놀랄 마술 같은 패밀리 이벤트, 또는 천인공노할 음모가 어디선가 은밀하게 만들어지고 있는지 모른다.



박명훈 주필 pmho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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