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비틀스의 핵심 멤버였던 존 레넌과 폴 메카트니가 경쟁의식으로 서로 발전했듯 우선 주변에 있는 이들이 내 능력을 끌어올려줄 수 있는 이들인지 살펴야 한다고 조언했다.
비틀스가 처음부터 성공을 거둔 것은 아니다. 이들에게도 춥고 배고픈 시절이 있었다. 독일 함부르크 시절 비틀스의 연주 공간은 포르노 극장이었다. 이들은 창문이 없어 공기가 통하지 않는 막 뒤에서 잠을 청해야 했다.
브라운 부사장은 이 대목에서 현 상황이 마음에 들지 않아도 앞으로 보상 받을 수 있으리라 믿고 견뎌야 한다고 강조했다.
1962년 여름 비틀스는 '실버 비틀스'라는 이름으로 스코틀랜드를 돌며 다른 가수들이 노래할 때 뒤에서 반주했다. 이런 비틀스에 관심 가진 음반사는 한 곳도 없었다. 엡스타인은 EMI 계열사였던 팔로폰 레코드의 조지 마틴 대표에게 비틀스를 소개했다. 당시 마틴 대표는 비틀스의 연주 실력보다 카리스마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 팔포론에서 발매한 비틀스 앨범은 대박을 터뜨렸다. 브라운 부사장은 비틀스처럼 기대하지 않은 곳에서 대박이 터질 수 있으니 사업할 때 모든 가능성을 검토해야 한다고 충고했다.
모름지기 사업에서 같은 실수는 결코 용납할 수 없다. 딕 로는 비틀스를 거부한 일화로 유명하다. 1961년 마지막 날 비틀스는 영문도 모른 채 밴을 타고 한참 이동한 뒤 밤 10시 런던 트라팔가 광장에 내렸다. 다음날 아침 로의 음반사 데카 로코드에서 15곡을 녹음했다. 엡스타인이 비밀리에 데카와 계약을 추진하기 위해 꾸민 일이다. 로는 비틀스 곡이 녹음된 테이프를 받은 뒤 엡스타인에게 "기타 밴드가 성공할 수는 없다"고 잘라 말했다.
로로부터 거부당한 지 2년이 채 안 돼 비틀스는 매니아를 끌어 모으는 그룹으로 탈바꿈했다. 로는 콘서트장에서 우연히 조지 해리슨을 만났다. 로는 해리슨에게 재능있는 밴드들을 찾고 있다고 말했고 해리슨은 비틀즈의 친구였던 롤링 스톤즈를 언급했다. 해리슨이 롤링 스톤즈에 대해 좀 더 설명을 해 주려 하기도 전에 로는 이미 해리슨의 눈 앞에서 사라지고 없었다. 그 날 밤 롤링 스톤즈는 로의 회사와 어마어마한 계약을 맺었다.
브라운 부사장은 "기업을 경영하다 보면 뭔가 포기해야 할 때도 있다"고 지적했다. 하지만 지나치게 많은 것을 포기하는 것은 금물이다.
엡스타인은 음반사 노던 송스의 딕 제임스 대표에게 비틀스의 저작권에 관한 한 거의 모든 권한을 넘겨줬다. 비틀스의 방송 시간을 따내기 위해서였다. 그 결과 레넌과 메카트니는 자기들 초기 음악에 대한 저작권을 되찾지 못했다.
1969년 9월 26일 비틀스가 마지막으로 녹음한 '애비 로드'라는 앨범이 발표됐다. '애비 로드'에 걸작이라는 평이 쏟아졌지만 녹음 당시 비틀스는 이미 사실상 해체 상태였다. 레넌은 오노 요코에게 빠져 다른 세 멤버로부터 불만을 샀다. 그보다 앞서 같은 해 1월 조지 해리슨은 밴드 탈퇴를 선언했다. 하지만 메카트니의 노력으로 '애비 로드'가 발매되고 탈퇴를 선언했던 해리슨은 돌아왔다. 돌아온 해리슨은 '섬싱(Something)', '히어 컴스 더 선(Here Comes The Sun)' 같은 명곡을 '애비 로드'에 담아냈다.
브라운은 어려울 때일수록 자기 일에 집중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1970년 4월 10일 메카트니는 비틀스 탈퇴를 선언했다. 이로써 비틀스는 공식 해체됐다. 그러나 솔로로 돌아선 메카트니는 비틀스에서 활동할 당시 못지않게 성공했다. 이는 다른 멤버도 마찬가지다.
사업하다 보면 때로 파트너와 이별해야 할 때도 있다. 하지만 이런 상황에서도 흔들리지 않고 자기 길을 걸어가는 사람만이 성공할 수 있다는 게 비틀스에게서 배우는 교훈이다.
<ⓒ투자가를 위한 경제콘텐츠 플랫폼, 아시아경제(www.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