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G 휴대폰, PC통신, 삐삐.."아무리 세상이 변해도..난, 너를 못버려"

일편단심 'IT 빈티지族' 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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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경제 김철현 기자]#1. 중소기업을 운영하는 김정희(64)씨는 스마트폰과 동떨어진 삶을 산다. 10년 넘게 사용한 016 번호를 아직도 유지하고 있는 것. 편리하다는 스마트폰의 유혹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김씨는 거래처가 모두 알고 있는 이 번호를 바꾸고 싶은 생각이 손톱만큼도 없다.


#2. 직장인 이준호(36)씨는 천리안 사용자다. 대학 시절 가입한 천리안의 동호회 회원들과 여전히 정기적인 모임을 갖고 당시 메일 주소도 그대로 사용하고 있다. 파란 화면의 PC통신은 사라졌지만 그는 여전히 주저 없이 자신을 천리안 사용자라고 말한다.

눈 뜨면 달라지는 ICT(정보통신기술) 시장의 천지개벽에도 홀로 시간이 멈춘 'IT 빈티지(vintage)족'이 눈길을 끌고 있다. 롱텀에볼루션(LTE) 시대에 2세대(2G) 휴대폰과 01X 번호를 고집하는가하면 1990년대 중반 가입했던 PC통신과 인연의 끈을 놓지 않는 사용자들도 적지 않다. 무선호출기(삐삐) 가입자도 여전히 1만8000명에 달한다. 하루가 멀다하고 신기술이 쏟아지는 ICT 산업이지만 느림의 철학을 만끽하고 있다.


4일 방송통신위원회에 따르면 01X 번호를 사용할 수 있는 2G(CDMA) 사용자들은 전체 휴대폰 가입자의 20%(1000만명) 수준이다. 최근 몇 년 새 010 번호를 쓰는 3세대(3G)와 LTE로 빠르게 사용자가 이동하고 있지만 여전히 011, 016, 017, 018, 019 등의 식별번호 사용자는 국내 통신 시장의 한 축을 이루고 있는 것이다.

이들은 010을 사용하지 않는 이유에 대해 "오랫동안 사용한 번호를 바꾸고 싶지 않아서"라고 답했다. 특히 중ㆍ장년층이 많아 복잡한 스마트폰 사용에 거부감을 느끼는 것도 'IT 빈티지족'이 존재하는 이유다. SK텔레콤의 2G 가입자를 들여다보면 법인 고객을 제외하고 50대 이상이 61%였고 40대 이상으로 집계해 보면 82%에 달했다.


설움도 적지 않다. 우선 휴대폰이 고장나도 신제품으로 바꾸기 어렵다. 최근 삼성전자가 내놓은 '와이즈2 2G'는 21개월 만에 나온 2G폰이었다. 그 만큼 보조금 등 각종 혜택과도 거리가 멀다.


하지만 IT 빈티지족들은 과거의 서비스가 커뮤니케이션 서비스라는 본질에 더 가깝다고 강조한다. 011 번호와 2G 휴대폰을 사용하고 있는 주부 김금란씨는 "휴대폰으로 통화와 문자 정도만 사용하기 때문에 불편이 없다"며 "카카오톡 등 새로운 기능을 익히는 것 보다 오랜 기간 사용해온 번호로 직접 전화를 걸고 목소리를 듣는 것이 더 좋다"고 밝혔다. 스마트폰의 확산으로 새로운 커뮤니케이션 수단이 홍수를 이루고 있지만 오히려 관계는 소원해지고 있다는 점을 지적한 것이다.


휴대폰 이전 대표적인 무선 연락 수단이었던 삐삐도 사용자들을 유지하고 있다. 방통위에 따르면 무선호출서비스의 사용자는 1만8000명 수준이다. 주로 병원 등 특정 업무에 사용되는 경우가 많지만 삐삐가 울리면 전화기로 달려가는 이들은 여전히 남아 있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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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ㆍ포털 업계에도 과거에 머물러 있는 IT 빈티지족이 적지 않다. 1990년대 중반 젊은 세대에서 큰 인기를 누리던 PC통신이 대표적이다. 하이텔, 나우누리 등은 역사 속으로 사라졌지만 천리안은 여전히 명맥을 유지하면 서비스를 하고 있다. 천리안을 서비스하는 곳은 LG유플러스의 자회사인 미디어로그다. PC통신 시절의 파란색 접속 화면은 아니지만 천리안 사용자는 그 시절의 메일 주소를 그대로 사용할 수 있는 것을 위안으로 삼는다. 최근에는 PC통신의 대화방을 그대로 재현한 'PC통신 채팅'이라는 애플리케이션도 출시돼 이들의 향수를 자극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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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일자로 서비스를 접은 나우누리는 기존 사용자들을 중심으로 '나우누리 살리기 위원회'가 조직되기도 했다. 이들은 나우누리(nownuri)가 포함된 도메인을 확보했고 서비스를 다시 살리기 위한 활동에 매진하고 있다. 회사는 타산이 맞지 않다는 이유로 서비스를 종료했지만 사용자들이 직접 운영하겠다고 나선 것이다. 나우누리 살리기 카페에는 현재 100여명의 사용자들이 참여하고 있다. 이들은 "추억이 묻어 있는 서비스가 종료된다는 것이 안타깝다"며 "PC통신 시절의 향수를 가진 이들이 많기 때문에 여전히 커뮤니티 서비스로 가치가 있다고 본다"고 강조했다.


업계 관계자는 "고가의 스마트폰도 교체 주기가 점점 짧아지는 등 IT 분야에서 변화의 속도는 일부 사용자들이 따라가기 힘들 정도로 빠르다"며 "새로운 서비스에만 집중할 것이 아니라 옛 서비스를 사용하는 이들을 위한 업체들의 지원도 필요하다"고 말했다.


김철현 기자 kc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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