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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기업성장사]미군 캔맥주 실어나르며 신뢰 쌓은 한진, 전후 재벌 막차 합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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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商道, 그 빛과 그림자의 뜨락
<42>전후 복구사업에 몰려들 때 빛난 조중훈의 선택

-한강인도교 복구사업 따낸 현대
-대림·삼부 등과 '건설 5인조' 부상
-유일하게 정비공장 소유한 한진
-美 장교에 풀코스식사 대접 등
-기업능력 홍보 탁월한 솜씨 발휘
고 조중훈 회장(사진 앞줄 왼쪽)이 1969년 신상철 주월대사(사진 오른쪽)와 함께 베트남 퀴뇬항의 하역 현장을 돌아 보고 있다.

고 조중훈 회장(사진 앞줄 왼쪽)이 1969년 신상철 주월대사(사진 오른쪽)와 함께 베트남 퀴뇬항의 하역 현장을 돌아 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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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 직후 미군정기와 한국전쟁을 치르는 격동기 속에서 한국 자본주의가 상업자본에서 산업자본으로 전환돼 갈 때, 다시 말해 경제적 원리보다는 시대 상황에 따른 그 바깥 요인이 지배적이었을 때 재벌로 가는 마지막 열차는 미국의 원조 자금으로 시작된 전후 복구사업에 따른 건설이었다. 그 대표적인 기업이 대동공업, 조흥토건, 삼부토건, 극동건설, 흥아공작소, 대림건설, 현대건설 등이었다. 이들은 대부분 1953년 휴전 이후 전재 복구 건설 경기의 붐을 타면서 마지막으로 재벌의 반열에 합류한 기업이었다.

이들 가운데 정주영의 현대건설은 앞서 언급한 것처럼 부산 피난 시절 미군 10만 명의 임시 숙소 건설을 한 달 만에 뚝딱 만들어낸데 이어 한겨울에 부산 UN군 묘지를 푸른 잔디로 단장하라는 난제를 청보리 싹으로 뚝딱 해치우면서 신임을 얻어 줄곧 미군 군용건설사업 주변에서 맴돌았다. 그러면서 휴전이 성립됐을 땐 이미 사업 기반을 다져 국내 유수의 건설업체로 부상한 터였다.

부산 피난 시절 미군 군용건설 사업으로 기반을 다져나갈 수 있었다면, 한국전쟁 때 우리가 폭파시킨 한강 인도교 복구 사업을 하면서 마침내 건설업계 선두 그룹에 낄 수 있게 됐다. 그럴 만도 했던 게 1957년 당시 한강 인도교 복구 사업비는 2억3000만환이었다. 단일 공사로는 전후 최대 규모였기 때문에 건설업계가 놀랐던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애초에 이 공사를 내무부 장관은 조흥토건에 주려했다. 공사 승인권을 가지고 있던 재무부 장관은 흥화공작소를 밀었다. 이때까지만 해도 현대건설은 그저 아무 공사 수주 경쟁에나 무조건 뛰어들어 끝까지 용을 써보는 후보군이었을 따름이다.
하지만 예산 집행이 1년이나 연기되도록 누구도 양보를 않고 끝내 타협점이 찾아지지 않자 결국에는 경쟁 입찰에 부치게 됐다. 아무데나 머리를 들이밀고 보는 현대건설 또한 이때 다른 경쟁 업체들 사이에 끼어 응찰했다.

한데 흥화공작소가 단돈 '1000원'에 응찰하면서 기부 공사를 하겠다고 나섰다. 당시 1000원은 한강 공사 현장에서 남대문까지 시발택시 왕복 요금에 불과한 액수였다. 경쟁 업체들은 모두가 쓴웃음을 지었다. 어떻게든 공사를 따서 돈을 벌어보겠다고 나선 마당에, 단돈 '1000원'에 기부 공사를 하겠다는 데야 딴은 할 말도 없었다.

입찰서를 뜯어본 주무 장관은 '1000원'에 응찰을 한 흥화공작소는 입찰 의사가 없는 것으로 보고, 정부가 기부 공사를 받을 수 없다는 공식 입장을 내놓았다. 아울러 응찰 가격 두 번째였던 현대건설에 한강 인도교 복구공사가 자동 낙찰됐다. 이때부터 대동공업, 조흥토건, 삼부토건, 극동건설, 대림건설, 현대건설 등을 일컬어 흔히 '건설 5인조'니 '6인조'니 하며, 세인들의 입에 오르내리기 시작하면서 1000여 대소 건설업체들 가운데 단연 선두 그룹에 이름을 올릴 수 있었다.

당시 건설업계 1, 2위를 다툰다는 이재준의 대림건설 또한 현대건설과 같은 노정을 걸었다. 다만 현대건설이 부산 피난 시절 미군 군용 건설사업 주변에서 맴돌았다면, 대림건설은 주로 정부가 발주한 관급 공사를 도맡다시피 했다. 사회부가 발주한 피난민 집단수용소를 비롯해 국방부의 조병창, 진해 해군본부의 천막 병사 보수공사, 산업은행 제주지점 사택 신축공사, 부산금융조합 중앙지소 화재 복구공사 등을 잇달아 시행하면서 고달프기만 한 피난살이 속에서 나름대로 기반을 닦아나갔다.

특히 대한금융조합연합회가 발주한 전남 여수금융조합 건물 신축공사는 천운이었다. 가뜩이나 어려웠던 부산 피난 시절에 이 공사 대금을 받았는데, 이 돈은 서울 수복 후 대림건설이 움직이는데 효자 노릇을 한 것이다.

1950년대 현대건설을 중소업체에서 상위그룹으로 도약시킨 미군 공사 계약 현장에서 고 정주영 명예회장(오른쪽)이 사인을 하고 있다.

1950년대 현대건설을 중소업체에서 상위그룹으로 도약시킨 미군 공사 계약 현장에서 고 정주영 명예회장(오른쪽)이 사인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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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서울로 올라온 대림건설이 가장 먼저 한 일은 서울역 앞 용산구 동자동에 위치한 옛 부림상회(대림건설의 옛 사명) 서울지점 자리에 당시 서울 시내에서는 고층 빌딩에 속하는 4층짜리 사옥을 지어 입주한 것이었다. 이 건물은 1937년에 신축된 화신백화점을 사옥이 아닌 사업장으로 분류했을 때 '한국기업성장사'에서 최초의 사옥다운 사옥으로 기록되고 있다.

건물의 설계는 일찍이 경성고등공업학교를 나와 서울의대 병동 등을 설계한 바 있는 원로 건축가 장연채가 맡았는데 당시로서는 꽤 모던하다는 평판을 듣기에 모자람이 없었다. 자유당 시절 대통령 이승만이 그 앞을 지나가다 "누가 저렇게 크고 멋진 건물을 지었느냐?"고 감탄했다는 일화가 전할 정도였다.

이같이 대림건설은 당시 업계에선 보기 드물게 번듯한 사옥까지 지어 입주하면서 전후 복구공사에 본격적으로 뛰어들 만반의 채비를 마쳤다. 실제로 국가 기간 시설물과 공공건물 등 전재 복구공사를 통해서 어느 정도 체제 정비와 경영의 발판을 마련한 것도 사실이었다.

더욱이 전후 건설업계는 자고나면 영웅이 탄생하는 춘추전국시대였다. 먹잇감인 토건 현장도 해마다 큰 폭으로 늘어났을 뿐더러 공사의 유형도 단순한 토목 ㆍ건축에서 플랜트 건설 등 국가 기간산업 건설로 점차 확대되어 나가는 추세였다.

그러나 대림건설은 현대건설이 전후 한강 인도교 복구공사를 낙찰 받으면서 순조로운 출발을 보인 반면에 된통 한차례 홍역을 치러야 했다. 이른바 '미도파백화점 강탈사건'이 그것이다.

1953년 서울로 다시 환도한 정부는 '도시 건물 복구령'이라는 각령을 내렸다. 민간인이 자기 자금으로 서울 시내의 대형 건물을 복구ㆍ수리하는 사람에게 얼마 동안 점유권을 인정해주는 법령이다. 전쟁이 끝나면서 재정 상태가 거의 파탄지경에 이르렀던 정부로서는 전재 복구를 위한 궁여지책이었던 셈이다.

대림건설은 이러한 정부 방침에 따라 환도 이듬해에 자본금 50만환으로 서울부동산㈜을 설립하고 명동 입구에 자리한 정자옥(丁子屋)을 관재청으로부터 임대받았다. 이 건물은 일제시대에 일본인이 창설한 백화점으로 해방 후 민간인에게 매각돼 관리돼 오던 중에 전쟁을 만나 불타고 무너져 내려 흉측한 몰골로 그 뼈대만이 앙상하게 남아 있었다. 대림건설은 전국 각처에서 최고급 자재들을 구해다가 내 외부를 말끔히 수리하고 단장한 뒤, '미도파'란 이름을 붙여 다시금 백화점으로 개업했다.

미도파(美都波)란 이름은 '전쟁으로 폐허가 된 시내의 중심지를 아름답게 가꾸고 꾸며서 도시미를 되살려 냈으며 또 이러한 백화점에 화려하게 성장한 신사 숙녀들이 마치 물결을 치듯이 몰려든다'는 뜻으로, 당시 거액의 현상금을 내걸고 응모한 결과 당선된 사명이었다. 실제로 美都波를 그냥 한글로 미도파라고 표기해도 받침이 없어서 읽고 쓰기에 편할 뿐더러 기억하기도 쉬워서 세련미를 갖춘 상호라는 평판을 들었다.

한데 그 같이 다시 개업한지 얼마 되지도 않아 그만 엉뚱한 데서 말썽이 일어났다. 당시 국회 부의장을 역임했던 자유당의 최 아무개가 한국무역협회장으로 취임하면서 역시 자유당의 2인자였던 이기붕을 움직여 대통령 이승만에게 이렇게 간청했다고 한다. '미도파는 외국의 사치품만을 전시하고 판매함으로써 국민의 위화감을 부채질하고 사치 풍조를 조성하고 있는 만큼 국산품 장려를 위해서라도 무역협회로 이관해 달라'고 한 것이다. 물론 지금의 상식으로 본다면 어림 반 푼도 없는 얘기였다.

그도 그럴 것이 당시만 해도 시장경제를 지배하고 있는 것은 외국의 구호물자와 밀수품이 전부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국산품이라야 어디 내놓을 만한 것이 없던 시절이다. 더구나 다른 기관도 아닌 무역협회에서 국산품 애용 운운하는 것은 이치에도 맞지 않는 억지였다.

하지만 권좌에 너무 오래 앉아 있었던 이승만은 귀가 얇았다. 엄연히 '도시 건물 복구령'에 따라 대림건설이 합법적으로 임대한 건물의 운영권을 무역협회에 넘기도록 하는 어처구니없는 지시를 내리고 만 것이다. 결국 서울부동산의 미도파백화점은 내 외부를 말끔히 수리하고 단장해서 개업한지 불과 1년여 만에 그 운영권을 무역협회에게 강탈당하면서 백화점 사업을 포기했다.

흔히 역사에서 가정이란 있을 수 없다고 말한다. 그러나 만약 이때 대림건설이 미도파백화점을 계속해서 경영했더라면 그 결과는 과연 어떻게 되었을까. 분명 이후 대림의 체질이 많이 바뀌어졌을 것으로 보여 진다. 또 그 같이 바뀌어 진 체질을 부단히 학습ㆍ단련하고 거듭 진화시켜 나가는 가운데 오늘날 대림의 모습은 크게 달라져 있을 것으로 믿어진다. 그리해 주력 기업이 건설이 아닌 유통으로 옮겨가면서, 어쩌면 지금쯤 롯데와 양보할 수 없는 치열한 각축전을 벌이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또한 그렇게 되었을 때 오늘날 대림의 위치가 어디쯤에 서있을지도 궁금한 일이다.

이밖에도 전후 재벌로 탄생케 되는 마지막 열차는 운송이었다. 그 가운데서도 조중훈의 한진상사는 가히 눈부신 비상을 보여줬다.

조중훈 역시 전쟁 통에 부산으로 피난을 떠났다가 휴전 이후 다시 돌아왔으나 인천은 이미 잿더미였다. 남아 있는 거라곤 폐허로 변한 한진상사의 부지와 은행 부채 뿐이었다. 무엇보다 재기를 위해서는 자금의 융통이 가장 큰 문제였는데, 전쟁 전의 신용을 인정받아 무담보로 대출을 받을 수 있었다. 옛 단골들의 도움도 이끌어 냈다.
같은 시기 경인 지역에는 한진상사와 엇비슷한 규모의 운수업체가 어림잡아 50개쯤은 됐다. 특히 인천에는 전후 복구를 위한 물자 하역으로 생각보다 흥청대는 분위기였다. 그 중에서도 미군이 인천항으로 직접 반입해 전국 각처로 운반하는 보급물자 수송이 운송업자라면 누구나 관심이 갔다. 하지만 군인들이 직접 수송하는 군수물자를 겨우 트럭 몇 대만을 보유한 민간인 업체가 해보겠다는 것 자체가 그림의 떡이요, 우스운 발상이었다.

게다가 당시 미군은 한국 업체의 수송 능력은 고사하고, 근본적으로 한국인 자체를 신용하지 않았다. 유감스럽게도 인천 부두에서는 군수품 도난 사건이 심심찮게 발생했고, 심지어 달리는 트럭에까지 뛰어올라서 군수품을 탈취해 달아나는 경우조차 빈번했던 것이다. 모두가 없는 가난이 죄였다.

그러나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고 그는 스스로 기회를 만들어냈다. 미군이 직접 수송하던 캔 맥주를 시험적으로 대리 수송해볼 기회를 만든 것이다. 본격적인 용역 형태의 계약이 아니라, 부두에서 지정된 부대까지 옮기는 대리 수송에 불과했지만, 차량에 대한 사전심시와 운전기사에 대한 신원보증까지 거친 뒤에야 성사된 대리 시험 수송이었다. 그러면서 경계의 눈빛으로 바라보던 그들도 점차 신뢰를 갖는 듯했고, 교류도 깊어져 갔다.

또 다른 한편으로는 매사에 자본주의적 합리성에 준해 처리하는 그들의 심리 등을 곰곰이 헤아려, 한진상사가 믿을만한 계약 당사자임을 깨닫게 하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판단이 섰다. 따라서 미군을 대할 때면 우리 특유의 인간적인 면모와 함께 동등한 계약 당사자로서의 의연함을 지키려 애썼다. 미군과의 계약은 일방적이 아니라 쌍무계약이었기 때문에 업자 측의 입장도 상당 부분 존중됐다. 그들은 땀 흘려 정당하게 재산을 형성한 부자를 오히려 존경했다. 때문에 불필요한 저자세로 굽실거리기보다는 원하는 바를 반드시 생산할 수 있는 기업가라는 걸 보여줄 필요성이 있었던 것이다.

그런 생각에 조중훈은 일부러 지프차를 이용치 않았다. 당시 내놓으라하는 기업가들이 다투어 지프차를 이용했지만 대개 그 출처가 불분명해 오해받기 쉬웠기 때문이다. 대신 당시엔 구경하기조차 힘들다던 벤츠 승용차를 타고 다니면서 기업인으로서의 확실한 신뢰감을 심어가며 교류의 폭도 넓혀나갔다.

특히 한번 알게 된 미군이 임기를 끝내고 돌아갈 적에도 집에까지 초대해 송별연을 베풀어주곤 했다. 미국에서도 쉽지 않다는 풀코스의 식사도 정성을 다해 대접하면서 인간적으로 신뢰할 수 있는 관계를 맺고자 했다. 그러면서도 접대 석상에선 업무에 관한 사항은 일체 입 밖에 꺼내지 않았다.

그런 끈질긴 노력 끝에야 비로소 미군의 구매계약 담당관이 나와서 한진상사의 차고를 비롯하여 정비 시설 등 현장 조사를 실시했다. 당시 수송 업체로서는 유일하게 자체 정비공장을 운영하고 있었던 사실이 미군의 마음을 얻는 결정적인 요인이었다.
마침내 1956년 가을, 미8군 군수참모 부장실에서 첫 계약이 이뤄졌다. 6개월 잠정 계약으로, 수송 도중의 사고로 인한 손해는 한진상사가 전액 배상하되 수송에 따른 유류는 미군이 별도로 현물 지급하는 것을 골자로 하는 계약서에 서명한 것이다. 기름 구하기가 무척이나 어렵던 시절에 이런 조건은 다른 업체들보다 원가를 줄이는데 도움이 컸다. 이렇듯 조중훈의 한진상사는 당시 1인당 국민소득 100달러도 안 되는 시절에 7만 달러에 달하는 계약서에 서명을 하면서 1950년대 재벌로 가는 마지막 열차에 합류할 수 있게 됐던 것이다.

작가 박상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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