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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기업상장史]<20>약·비누·생리대…동포가 원한건 뭐든 수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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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박상하가 쓰는 재계 通史

<20>나는 사업을 하는 사람이다. 공익을 위한...
-GE사 첫 동양인 직원..중국 총 지배인 고사하고 개인사업
-조선서 50만원 갖고 유한양행 설립, 미국계 기업 낙인에 日 핍박
 일제 강점기 나라 안에서 혹은 일본과 중국 등지에서 속속 등장하게 되는 많은 기업인 가운데 유일한은 한국기업성장사에 몇 가지 특이한 이력을 적바림한 인물이다.

 그는 우선 전통적인 토지 자본가 아니면 서민 출신의 기업인이 고작이었던 근대에 보기 드문 미국 유학파였다. 더욱이 미국 최고 기업 가운데 하나인 제너럴일렉트릭(GE) 동양인 1호 사원이었을 뿐더러 그 자신이 미국에서 기업을 일으켜 성공한 기업인이기도 했다. 그런 그가 고국으로 돌아와 한국기업성장사에 또 다른 지평을 열어보였던 것이다.

故 유일한 박사

故 유일한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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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일한은 1895년 평양에서 태어났다. 그가 태어난 당시는 중국과 일본이 한반도에서 독점적 지배권을 차지하기 위해 일으킨 청일전쟁과 동학혁명, 갑오경장 등으로 나라 안팎이 급격한 변화의 소용돌이로 치닫고 있던 때였다.
 그의 아버지 유기연은 일찍이 서양문물을 받아들여 세계적 브랜드인 '싱어(Singer)' 재봉틀 평양대리점을 운영하고 있었다. 전통적 관습에 얽매이는 것을 싫어했다. 당시 그는 조선에 들어온 미 북장로회의 새뮤얼 모펫에게 세례를 받은 몇 안 되는 사람 중 하나일 만큼 일찍이 기독교를 받아들였다. 새뮤얼 모펫은 숭실대 설립자다.

 유기연은 교육열도 대단했다. 9남매 가운데 차남은 러시아, 3남은 중국, 5남은 일본에 유학시킬 정도였다. 장남 유일한을 9살 어린 나이에 미국으로 유학을 보낸 것도 딴은 그런 교육열 때문이었다.

 더구나 당시는 독립협회를 비롯한 애국계몽단체들이 '아는 것이 힘이다, 배워야 산다'며 목소리를 높일 때였다. 이런 시대적인 분위기와 선교사들의 권유에 힘입어 유기연은 코흘리개 맏아들을 멀리 미국으로 보내게 됐던 것이다.

 1904년 미국 중앙부에 해당하는 네브라스카주의 농촌도시 커니에 도착한 9살 코흘리개 유일한은 침례교회의 소개로 독실한 신자 집에 맡겨졌다. 하지만 프로테스탄티즘의 영향을 받은 그 집에선 유일한을 그냥 놓아두지 않았다. 자질구레한 집안 청소는 물론 물을 긷고 땔감용 장작을 패야 했다. 연료용 석탄을 나르고 난롯불 관리도 그의 몫이었다.

 평양 부잣집의 맏아들로 태어나 고생이라곤 해보지 않았던 그였지만 새로운 생활에 이내 적응했다. 어렸을 때부터 아버지에게서 배운 강인한 의지력 덕분이었다.

 커니에서 초등학교와 중학교를 마친 유일한은 운동에도 남다른 소질을 보였다. 미국의 또래 아이들에 비해 체구는 작았지만 신문배달을 하면서 새벽길에 다져진 체력은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았다.

 고등학교에 진학하면서 그는 정들었던 커니를 떠나게 됐다. 미식축구 선수로 장학금을 받아 진학하게 된 고등학교가 헤스팅스에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런 사실을 아버지에게 자랑하려고 알렸다가 되레 질책만 들었다. 공부를 열심히 해야지 무슨 운동이냐고 한 것이다. 그는 아버지에게 '미국에서는 성적이 우수해야 운동을 할 수 있으며, 장학생이라야 선수로 뽑힐 수 있다'고 설명한 뒤에야 운동을 계속할 수 있었다.

 실제로 그는 여러 면에서 두각을 나타냈다. 학교 미식축구 팀의 주전선수였을 뿐더러 웅변도 뛰어났고 리더십 또한 남달랐다.

 그가 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미시간대 경영학과에 진학할 수 있었던 것도 모든 면에서 우수했기 때문이다. 당시만 해도 고교 졸업생 대부분이 대학에 가지 못한 때였다. 몇몇 뛰어난 학생들만이 대학 진학이 가능했던 것이다.
고교시절 미식축구 선수로 활약한 유일한 박사(사진 앞줄 가운데).

고교시절 미식축구 선수로 활약한 유일한 박사(사진 앞줄 가운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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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지만 대학생활은 녹록치 않았다. 무엇보다 그를 괴롭혔던 건 돈 문제였다. 공부하면서 학비는 물론 생활비까지 벌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럴 때 무슨 아이디어 하나가 불현듯 그의 뇌리를 스쳤다. 평소 이따금 중국음식점을 찾곤 했는데, 중국인들이 머나먼 타국에서 향수를 달래기 위해 고국에서 가져온 물건을 끔찍이 여기는 걸 보았었다. 더구나 주위에는 대륙횡단철도 건설 노동자로 중국 이민자들이 넘쳐나고 있었다.

 '중국인들의 고국 향수를 이용해 장사한다면 잘 될 수 있잖을까?'
 그렇게 생각한 유일한은 등록금을 내고 남은 돈을 털어 중국에서 들어온 물건들을 사들였다. 남자보다는 여자들이 두고 온 가족이며 고국을 더 그리워할 것으로 생각해 여자들이 선호할 물건들 위주로 골랐다. 비단으로 짠 손수건, 인형, 장신구며 일상용품, 심지어 중국 카펫까지도 구해다 강의가 없는 날이면 팔았다.

 장사는 잘 됐다. 처음엔 별 신통치 않게 여기던 중국인들도 고국에서 건너온 물건들을 보곤 마음이 바뀌어 너도나도 사갔다.

 이 무렵 유일한은 중국 여성 호미리를 평생 반려자로 만난다. 재미 중국인 사회에서는 꽤 저명한 집안의 딸로, 그녀의 아버지는 미국 서부철도건설회사에서 중책을 맡고 있는 재산과 덕망을 갖춘 인사였다.

 하지만 미시간대를 졸업하자마자 두 사람은 잠깐 떨어져야 했다. 호미리가 미시간대의 학부를 끝내고 다시 의학을 전공하기 위해 동북부의 코넬대학으로 진학한 것이다. 코넬대학은 미국 최고 명문대였다.

 미시간대를 졸업한 이후 그의 행보 또한 흥미롭다. 그녀를 코넬대로 보낸 유일한은 잠시 미시간중앙철도회사의 회계사로 근무하다 1920년 뉴욕으로 자리를 옮겨 GE에 취직했다. 당시 GE에 동양인이라고는 그 밖에 없어서 처음엔 낯설었지만 점차 업무 능력을 인정받으면서 생활도 안정됐다. 호미리 역시 동양인 여성으로서는 처음으로 소아과 전문의 자격을 획득했다.

 두 사람은 1925년에 결혼했다. 누구보다 장래가 촉망되는 두 젊은이의 결합이었다.

 그러나 GE에 입사해 안정된 생활을 누리던 그는 점차 깊은 회의에 빠져들게 된다. 일제의 압박에 시달리고 있는 조국과 민족을 위해 큰일을 하라고 미국까지 유학을 보낸 아버지의 뜻이 젊은 그를 짓눌렀던 것이다.

 결국 유일한은 1922년 GE에 사직서를 제출했다. 당시 GE는 중국을 비롯한 동양 시장에 진출하기로 하고 유일한에게 이 지역의 총지배인을 맡길 예정이었으나 그는 거절했다.

 '회사에서 중책을 맡게 되면 결실을 얻을 때까지는 그 일을 계속해야 한다. 하지만 나는 언젠가 고국으로 돌아가야 할 몸이 아니던가. 인연이 더 깊어지기 전에 이쯤에서 그만 두는 게 옳은 일이다.'

 GE를 사직한 뒤 그는 숙주나물 사업을 시작했다. 그가 첫 사업으로 숙주나물을 택한 데에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다.

 두 사람이 결혼하기 전에 호미리가 그의 집을 찾아와 만두를 만들어준 적이 있었는데, 어린 시절 어머니가 빚어주는 맛이 아니었다. 호미리는 만두 속에 숙주나물이 들어가지 않아서 제 맛이 나지 않은 것이라고 설명했다.

 순간 그의 뇌리를 빠르게 스쳐지나가는 생각이 있었다. 숙주나물은 비단 만두뿐만 아니라 중국 요리에 반드시 들어가야만 하는 필수 재료인데도, 당시 미국에선 숙주나물의 원료인 녹두가 흔치 않아 맛없는 만두를 먹어야 했던 것이다. 따라서 신선한 숙주나물을 공급한다면 시장은 얼마든지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녹두를 구하는 게 문제였다. 그는 오하이오주에서 필라델피아까지 머나먼 길을 여행하며 녹두를 어렵사리 모아야 했다. 그런 다음 신선한 상태로 숙주나물을 공급하기 위해 투명한 유리병에 담아 공급하기로 했다.

 그러나 공급이 쉽지 않았다. 숙주나물을 유리병에 일일이 담아야 했기 때문에 일손이 많이 갔다. 더구나 유리병에 담긴 숙주나물의 신선도가 오래 가지 못했을 뿐더러, 유리병의 파손율 또한 높았다. 뭔가 포장 방법을 달리 하지 않으면 안 됐다.

 그래서 생각해낸 게 숙주나물을 캔에 담아보자는 거였다. 숱한 실패 끝에 결국 숙주나물 캔을 개발하는데 성공한 유일한은 디트로이트에서 식료품상을 하고 있던 대학 동창과 함께 숙주나물을 판매하는 '라초이식품회사'를 1922년에 설립했다.

 숙주나물 통조림은 생각보다 반응이 좋았다. 인근도시에서 주문이 쇄도했다. 회사 설립 4년 만에 50만 달러 이상의 수익을 기록하는 대단한 실적을 올렸다.

 이처럼 사업의 규모가 날로 커지자 미국에서 구하는 녹두만으로는 주문량을 모두 소화할 수 없어 1924년 중국으로 출장을 떠났다. 녹두를 안정적으로 확보하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돌아오는 길에 고국을 방문해 가족을 만났다. 9살 어린 나이에 미국으로 유학을 떠난 이래 첫 귀국이었다.

 중국 출장에서 돌아온 유일한은 1924년 서재필 박사 등과 함께 한국, 중국, 러시아 등지의 토산물을 취급하는 '유한주식회사'를 설립했다. 이 회사는 재미 동포들이 자본금을 투자해 설립됐으며 질병으로 고생하는 고국의 동포들을 위해 미국의 약품을 수출할 계획도 세웠다.

 이때 고국에서 독촉장이 날아들었다. 그가 고국을 찾았을 때 에비슨 학장이 연희전문학교의 교수를 맡아달라고 제의했었다. 그의 아내 호미리 역시 세브란스병원의 소아과장으로 초빙됐다.

 유일한은 고민에 빠졌다. 한창 잘 나가는 라초이식품회사와 유한주식회사를 계속 키울 것인지, 아니면 고국으로 돌아갈 것인지의 갈림길에서 망설이지 않을 수 없었다.

 결국 유일한은 라초이식품회사의 지분을 정리하고 받은 25만 달러를 갖고 1926년 귀국했다. 하지만 에비슨 학장의 제안은 거절했다. 교수가 되는 것보다는 자신의 경험을 십분 살려 민족의 자산을 지키고 키워 일제의 경제적 수탈과 압제에서 신음하는 동포들을 살리는 일이 급선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귀국하던 그 해 자본금 50만원(지금 돈 약 600억원)으로 '유한양행'을 설립하면서 제약업에 뛰어들었다. 그가 제약업에 뛰어들었던 것은 식민지 조선의 열악한 의료 현실 때문이었다. 약만 있으면 간단히 고칠 수 있는 사소한 질병인데도 약이 없어 죽어가는 사람이 너무도 많았던 것이다.

 유한양행은 유일한의 부인 호미리가 의사여서 약품을 대량으로 수입해 공급했지만 약품 외에도 취급 품목이 다양했다. 창립 초기에는 비누, 화장지, 생리대, 치약 등의 위생용품을 비롯해 화장품과 껌, 초콜릿 등도 수입해 팔았다. 심지어 농기구와 염료, 페인트도 수입했다.

 제약업을 한다던 유일한이 이같이 갖가지 품목을 수입해 들여왔던 건 의약품 판매를 확장하기 위해 전국을 돌면서 목격한 당시 농촌의 낙후 때문이었다. 효율적으로 농사를 짓기 위해서는 보다 편리한 농기구가 필요하다고 생각해 값싸게 보급했던 것이다.

 유한양행의 신문 광고 또한 특이했다. 당시만 해도 제약회사들은 서로 자기 제품이 최고며 진짜라고 허위ㆍ비방 광고로 이전투구를 벌이기 일쑤였으나, 유한양행의 광고는 확연히 달랐다. 광고에 회사 상표인 '버들표'를 복판에 넣고 약품의 효능만을 명시했다. 아울러 의학박사인 부인 호미리와 책임 약제사의 이름과 회사 전화번호를 싣는데 그쳤을 따름이다.

 그밖에도 유한양행은 일본 우편선회사와 캐나다 정부의 철도, 동경의 해상화재보험회사, 미국의 생명보험회사와 선박회사 대리점도 운영하며 사세를 더욱 늘려나갔다.

 1931년 만주사변 이후에는 만주까지 진출했다. 일본 제약회사들이 만주 시장을 독점하는 것을 수수방관할 수 없는데다 기업의 성장을 통해 민족자본을 형성해야 한다는 결심에서였다.

 1936년에는 유한양행을 주식회사 체제로 전환했다. 제약업계에서는 처음 있는 획기적인 일로 당시 민족계 제약업계가 모두 33개 사였는데 유한양행의 자본금 규모가 그 절반을 차지할 정도였다.

 그러나 승승장구하던 유한양행의 행진에 갑작스레 제동이 걸렸다. 1940년 태평양전쟁이 시작되면서 약품 배급은 일제의 통제 아래 놓였으며 심각한 원료 부족으로 인해 제약업계는 그 명맥조차 잇기 어렵게 됐다.

 더군다나 미국과 전쟁을 시작한 일본은 걸핏하면 유한양행을 '미국계 기업'이라며 갖은 핍박을 가했다. 의약품의 통제는 업무 수행이 불가능할 만큼 심했고 진주만 공습 직후에는 유한양행의 간부 사원들을 전원 종로경찰서로 연행할 정도였다.

 이때 유일한은 미국에 머물고 있어 화를 모면할 수 있었다. 유럽과 남북미의 제약업계를 두루 돌아보면서 유한양행의 약품과 한국 특산물을 수출해보기 위해 떠났다가 그만 발이 묶여버렸던 것이다.

 고국으로 돌아올 수 없게 된 그는 정세를 관망하는 한편, 훗날을 기약하며 미국 남가주대 경영학 석사 과정에 들어가 공부를 다시 시작했다. 공부를 계속하면서 위기를 돌파할 방법을 궁리하는 가운데 유일한과 그의 유한양행은 마침내 8ㆍ15 해방을 맞이할 수 있었다.

박상하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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