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답십리에서 태어났고 대학에 입학할 때까지 거기서 살았습니다. 행정구역상 서울이기는 해도 궁벽하기 짝이 없던 동네에서 자란 제게 세상은 너무 압도적이어서 자주 현기증을 느꼈습니다. 그리고 어쩌다가 한 여자를 '발견'하고 맙니다. 이제 돌이켜 보면 첫사랑은 누구에게나 불가피한 통과의례이며, 처음으로 자신의 운명이 타자와의 '관계' 속에서 이루어진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 일종의 성장 과정이라는 말에 수긍할 수 있습니다.
안정된 모습이라고는 털끝만큼도 보여주지 못했고 미래에 대한 자기확신이 없으니 그녀를 잡지 못한 것은 너무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절대로 스무 살 시절로 돌아가고 싶지 않습니다. 생각만 해도 부끄럽고 무엇보다 그 불안감을 견딜 자신이 없습니다. 그리고 가끔 혼자 생각합니다. '이렇게 세상에 안착해서 밥은 먹고 살 줄 알았더라면 그때 좀 다르게 행동할 수 있었을 텐데….' 물론 다 쓸데없는 생각이지요.
영화 '건축학개론'은 저와 몹시도 닮은(물론 외모는 훨씬 더 잘생긴) 스무살짜리 남자를 보여줍니다. 영화를 보면서, 그리고 많은 사람이 이 영화를 보기 위해 극장으로 모여드는 것을 보면서 비로소 깨달았습니다. 저 혼자 유난히 심하게 앓았다고 생각했던 그 시절의 경험이 사실 꽤 많은 사람이 겪은 보편적 체험일 수도 있다는 것을 말입니다. 그렇게 생각하자 묘한 연대감이 밀려왔습니다. 무뚝뚝하게만 보여 차마 말 걸지 못했던 위층 아저씨의 마음 속에도, 오직 성공에 목매고 달리는 것처럼 보이는 직장동료의 마음 속에도 사랑의 열병으로 인한 화인이 하나쯤 꼭꼭 숨겨져 있다고 생각하니 말입니다. 그래서 만나는 사람마다 이 영화를 보라고 권하고 또 권했습니다. 사람들의 마음 속에 잠자고 있는 그 시절, 개론 수업을 듣던 시절을 흔들어 깨워 보고 싶었으니까요.
김도현 국민대 경영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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