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해자의 아픔은 피해자의 상처 앞에서 작아져야 할까. 가해자의 고통은 피해자의 회복을 위해 가산되어야 할까. 다소 바보 같고 일견 도발적인 질문이지만 최근 일본 TV를 보면 자꾸 이 우문에 빠지게 된다. 후지TV에서 방영중인 목요 드라마 <그래도, 살아간다>가 꺼내 든 화두다. 친구에게 여동생을 살해당한 남자와 오빠를 살인자로 둔 여자의 이야기. 화해 불가능의 관계에서 시작하는 이 드라마는 인생의 모순과 질곡을 들춰낸다. 그리고 그 질퍽한 반죽 속에서 미래를 꺼내든다. 서로를 미워하던 감정이 한바탕 큰 소용돌이 속에서 묘한 접점을 찾아간다. 아파도, 슬퍼도, 괴로워도 삶을 포기하지 말아야 하는 이유를 <그래도, 살아간다>는 지독한 고통 속에서 찾아낸다. 낯선 희망으로 독려하는 미래가 아니다.
인간의 마음을 들여다보는 드라마
<그래도, 살아간다>는 이야기의 줄기만 볼 때 사회파 드라마다. 하나의 사건이 벌어지고 가해자의 가족들과 피해자의 가족들이 등장하며, 매스 미디어의 폭력적인 보도 속 가해자가 피해자로 몰린다. 2009년 아카데미 영화제 외국어영화부문 일본 대표작이었던 <아무도 지켜주지 않아>가 제시한 것과 같은 소재다. 미디어의 홍수 속에서 하나의 사건은 이제 가해자 없는 피해자를 낳는다. 혹은 불특정 다수가 가해자가 된다. 최근 5년간 일본 내에서 사회 문제가 되기도 했던 이 문제는 드라마와 영화, 소설 속에서 이미 수차례 그려졌다. 하지만 <그래도, 살아간다>는 미디어의 폭력성을 고발하지 않는다. 사회의 부조리를 논하려 하지도 않는다. 오히려 드라마는 옴진리교 사건의 가해자 가족들을 따라갔던 영화 <디스턴스>에서 고레에다 히로카즈가 그랬던 것처럼 인물들에 한 발짝 더 다가선다. 정말 가해자 가족의 심정이 어떨지, 그리고 피해자 가족의 아픔이 어떤 건지를 하얀 도화지에 그리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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