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K리더십]염포동의 갤로퍼 반란..1년새 '코란도帝國' 엎다
시리즈⑥ 뉴프런티어정신-(하) 현대정공의 지프차 도전기
서울~울산 수시로 오가며 밤샘 작업하는 직원들 독려
4륜구동차시장 점유율 50%, 판촉부장 장담 1년새 실현
미니밴 시장도 개척..최종단계 완성차 CEO 야망 실천
[아시아경제 채명석 기자] 1989년 임승근 현대자동차 이사(전 기아자동차 부사장, 2009년 7월 15일 별세)는 현대정공 이사로 발령을 받았다.
임 이사는 정부가 자동차공업 육성 기본계획을 발표한 1969년 공채 1기로 현대차에 입사했다. 이후 포드와 기술제휴로 생산한 '코티나'와 최초의 국산 개발 승용차인 '포니'를 비롯해 '스텔라', '엑셀', '쏘나타' 등의 개발에 모두 참여하는 등 사내 최고의 엔지니어였다. 그 때문에 그가 갑자기 현대정공으로 이동한 배경에 관심이 쏠렸다.
임 이사가 맡은 업무는 'J카(J-car)'라는 코드네임이 붙은 현대정공의 '지프차 개발 프로젝트.' 한 해 전인 1988년 7월, 정몽구 회장(당시 현대정공 사장)은 경영회의에서 지프차라고 불리는 '4륜구동 자동차'를 개발해 본격 사업화 할 것을 지시했다. J카 프로젝트가 바로 그것이다.
철도차량ㆍ전차ㆍ골프카 등 육상 운송수단을 비롯해 구명정ㆍ요트 등 해상 운송수단과 헬기 제조 등 항공우주사업에 이르기까지 전 분야에 걸친 운송사업을 사업화하고 있던 그는 최종 단계인 완성차 사업의 꿈을 실현하기 위한 야심을 실천키로 한 것이다.
이런 계획을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에게 보고하자 아버지는 "잘 해보라"며 정 회장을 격려했다. 자동차를 주력사업으로 육성해왔던 현대그룹은 현대차 생산차종과 중복되지 않는 차종을 생산해 제품 다양화를 실현한다는 차원에서 현대정공의 4륜구동 자동차 참여를 지원했다.
시기도 맞아 떨어졌다. 1988년 서울올림픽을 전후해 찾아온 '3저 호황(저달러ㆍ저금리ㆍ저유가)'으로 국민의 삶의 질이 도약했다. 출퇴근용 소형차 위주였던 국내 자동차 시장은 레저 붐이 일면서 산과 들 어디라도 갈 수 있는 다목적 4륜구동 자동차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건드리면 폭발할 정도로 잠재 수요가 컸다.
정부도 1986년 7월부터 시행된 공업발전법에 의한 자동차 공업 합리화 조치, 즉 3년간 승용차ㆍ소형 상용차 부문에 신규회사 참여를 금지하는 법을 1989년 7월 1일자로 해제할 예정이어서 현대정공이 시장에 참여하는 데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1988년 8월 8일, 김병주 차장(전 기아자동차 이사대우)와 마가인 차장(현 현대제철 부사장)등이 주축이 된 J카 프로젝트팀은 곧바로 견본 자동차를 도입하며 개발 작업을 시작했다. 그해 10월 사업추진 기본 방향을 수립한 뒤, 이듬해 3월 임 이사를 비롯해 현대차에서 13명의 기술 인력을 충원 받아 시험동 및 설계팀을 구성하며 사업은 구체화 단계로 들어섰다.
◆독자개발서 면허생산 전환= 최초 계획은 독자모델을 개발하는 것이었다. 현대차가 독자 모델로 미국시장에서 대성공을 거두고 있었기 때문에 정 회장도 당연히 현대가 만든 4륜 구동차를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1989년 6월 1일 미국 ECS ROUSH와 'X-100'이라는 다목적 시제차 제작 계약을 체결하고 그해 8월 중순부터 마북리 기술 연구소에서 개발에 박차를 가했다.
완성된 시제차를 1990년 3월부터 3개월간 미국으로 보내 현지 소비자 반응을 살펴봤다. 결과는 실망스러웠다. 성능ㆍ기술ㆍ디자인 면에서 미국 소비자의 취향과는 거리가 멀었던 것이다. 4륜구동 자동차는 일반 승용차에 비해 차체 구조가 복잡하고 내구성도 높은 데다가 미국에서는 글로벌 플레이어들이 대거 참여하고 있었다. 품질의 기대수준이 높다보니 후발업체의 참여가 쉽지 않아 보였다.
정 회장은 독자 모델 개발을 잠정 보류하고 기 개발된 차량을 조립ㆍ생산하는 면허생산 방식으로 방향을 선회했다. 완성차 시장에 조기 진출하고 신기술을 빨리 습득할 수 있는 이점 때문이었다. 독자 개발만 고집해 진출 시키지 못할 바에는 배우면서 실력을 쌓자는 뜻이었다.
여러 차종을 검토한 후 일본 미쓰비시의 내수용 디젤 지프차량인 '파제로(Pajero)' 모델로 결정했다. 미쓰비시는 현대차와도 다양한 분야에서 제휴를 맺어온 파트너였기에 협업도 쉬울 것이라는 점도 고려됐다. 1989년 10월 양사는 사업 추진 의향서를 교환하고 1990년 3월 17일 기술도입계약을 체결했다.
◆1년 만에 '코란도 아성' 무너뜨려= 1991년 9월 16일, 컨테이너를 생산하던 울산 염포동 2공장 컨테이너D동 자리에 연산 3만5000대 규모의 자동차 전용 생산 공장이 건설돼 갤로퍼 1호가 생산됐다. 열흘 후인 9월 25일 서울 남산 그랜드 하얏트 호텔에서 현대정공은 1000여명의 사회 지도층 인사를 초청해 갤로퍼를 공개했다.
면허생산 방식이었지만 갤로퍼는 사실상 현대정공의 작품이었다. 현대위아 관계자는 "설계도와 기술 자문을 얻었지만 기계라는 것은 사람이 얼마나 잘 만드는가에 따라 설계상의 성능보다 더욱 완성도를 높일 수 있다.
이런 점에서 현대정공 직원들은 완벽한 차체를 만들어내겠다는 의지에 따라 밤낮을 가리지 않고 부품과 차체 개발에 열을 올렸고, 정 회장도 하루가 멀다 하고 서울과 울산을 오가며 개발 과정을 지켜보며 독려했다. 덕분에 갤로퍼는 원형인 파제로와 동등한 또는 그 이상의 성능을 갖게 됐다"고 말했다. 잘 만들어진 갤로퍼를 본 정 명예회장도 매우 흡족해 했다고 한다.
직원들의 포부도 대단했다. 이지원 기아차 상품기획사업부장(전무)은 당시 현대차써비스 지프판촉부 부장을 맡고 있었는데, 갤로퍼의 시장 점유율 전망에 대한 기자들의 질문에 "50%"라고 답했다. 당시 국내에서 지프차는 곧 '코란도'를 의미했을 정도로 쌍용차의 위세는 컸는데, 그의 말을 들은 사람들은 혀를 내둘렀다. 더군다나 기술을 넘겨준 미쓰비시조차 한국에서는 지프 차량 시장이 크지 못할 것이라고 말했을 정도. 하지만 그의 장담은 불과 1년 만에 실현됐다.
갤로퍼는 생산 첫해 2934대가 팔려 329억9000만원의 매출을 올리더니 1년 후인 1992년에는 2만3738대가 팔려 그해 국내 4륜 구동차 시장(4만5732대)의 51.9%를 차지하며 쌍용차의 '코란도'와 기아차의 '록스타'를 제치는 이변을 기록했다. 1992년 현대정공이 갤로퍼로 벌어들인 돈은 2755억4000만원으로, 회사 전체 매출액의 약 22%를 차지했다. 단숨에 주력사업으로 도약했다. 정 회장의 예측력이 빛을 발한 순간이었다.
갤로퍼는 1994년 12월 19일에는 누적 생산 10만대 돌파에 이어 1997년 7월 현대정공 창립 20주년에는 20만대를 기록했다.
1992년 11월 러시아와 불가리아 등 동유럽 등지에 40대를 선적하며 시작된 수출도 매년 성과를 나타내 1994년 11월에는 중국시장에 진출했고 1998년에는 7497억원을 벌어들였다. 이러한 성과를 바탕으로 현대정공 차량사업은 IMF 외환위기가 벌어진 1998년 매출 1조원을 돌파(1조1000억원)했다.
◆'싼타모', 미니밴 시장 개척= 갤로퍼 성공에 고무된 정 회장은 1993년 새로운 시장 '미니밴'에 눈을 돌린다. 승용차처럼 생겼으나 승합차로 분류되는 미니밴은 대가족 시대에서 소가족 시대로 넘어가는 사회 풍속에 가장 이상적인 차종이었다.
미쓰비시의 '샤리오'라는 모델로 새 차종을 추가 개발한다는 방침을 수립했다. 샤리오는 당시 미쓰비시의 최신형 미니밴이었는데, 엔진ㆍ변속기ㆍ섀시 구조가 현대차의 쏘나타와 공용화가 가능해 초기부터 국산화율을 높일 수 있는 장점을 지니고 있었다. 5~6인승을 중심으로 라인업을 넓히기로 하고 '싼타모'라는 이름도 정했다.
그런데 정부는 싼타모의 외형이 승용차와 비슷하고 승차인원이 당시 국내법에서는 승합차로 분류하기가 어렵다는 이유에서 승인을 보류했다. 여기에 삼성그룹이 승용차 사업에 진출할 움직임까지 보이고 있었던 터라 현대정공의 사업을 승인해주기에는 부담감이 컸다는 관측이다.
정 회장은 처음 계획을 보류하고 쏘나타 엔진을 탑재한 7인승 싼타모를 개발하겠다고 정부에 제안했다. 또한 가능한 한 모든 부품을 국산화 하겠다고 약속했다. 결국 현대정공은 1994년 12월 정부로부터 '싼타모는 승합차'라는 유권해석을 받아 사업에 진출할 수 있게 됐다.
현대정공 울산 제2공장 내 1만3300평 부지에 완공된 싼타모 전용 공장에서 생산된 싼타모1996년 1월 3일 선보였다. 미니밴에 대한 개념이 생소해서인지 초반에는 판매에 어려움을 겪었으나 7개월 후 '레저용 차량(RV)'이라는 점을 강조한 '싼타모 플러스'가 출시되면서 판매가 급증해 그해 총 2만1816대가 팔려 나갔고, 이듬해 2월에는 6인승 승용 싼타모를 내놓음으로써 판매는 더욱 늘어났다. 이를 통해 싼타모는 갤로퍼와 더불어 현대정공 자동차 사업의 쌍두마차 체제를 이루게 된다.
◆'車 CEO'의 꿈을 살현= 현대차써비스와 현대정공을 통해 자동차 정비 사업을 해오던 정 회장은 갤로퍼와 싼타모를 통해 늘 꿈꿔온 완성차 사업에 본격 뛰어들었다는 점에서 각별한 의미를 지닌다. 특히 정 회장은 후발주자였음에도 불구하고 소비자들의 잠재욕구를 정확히 읽어 틈새시장을 키워내는 사업수완도 발휘했다. 정세영 명예회장으로부터 현대차 경영권을 넘겨받는 과정에서 갤로퍼 사업을 성공적으로 수행한 경험은 자동차 CEO로서의 그의 능력을 평가받는 계기가 됐다.
유기철 전 현대정공 부회장은 "자동차 사업 진출은 평소 자동차에 대한 정 회장의 강한 애착과 집념의 결실이며, 그 결과 당해 연도에 흑자를 실현하는 기록적인 성공 비화를 낳을 수 있었다. 한 가지 특별한 점은 정 회장은 갤로퍼와 싼타모의 성공에 고무돼 1997년에 충남 서산에 150만평 부지를 확보해 동시에 6개의 신규 RV, 스포츠유틸리티차량(SUV) 개발을 통해 승용차 사업 진출을 꿈꿨다는 것이다.
IMF 이후 기아차를 인수하고 현대차그룹 총수가 되면서 '서산 프로젝트'는 중도에 접었지만 당시 모든 자동차 메이커들이 과잉설비로 고전할 때 신규 자동차 사업의 꿈을 안고 이런 원대한 계획을 추진한 점은 오늘날 현대ㆍ기아차를 세계적인 기업으로 성장시킨 결과가 결코 우연이 아니라는 사실을 일깨워 준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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