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난제의 쟁점은 소생이 힘들어보이는 환자의 '죽을 권한'이 본인에게 있는지, 제3자가 이 환자를 '죽일 권한'이 성립 가능한지, 가능하다면 이 권한은 수많은 '제3자' 중 누구에게 줘야 할지, 그것이 과학을 뜻하는 의사인지 제도를 뜻하는 법관인지 여부를 가리는 일이다. 미국 뉴저지주 대법원은 1975년 이 어려운 질문에 맞닥뜨렸다. 사건의 내막은 이렇다.
친구들과 파티를 즐길 정도로 건강했던 캐런 앤 퀸란(당시 21세)은 그 해 4월 갑작스러운 호흡정지로 쓰러져 인공호흡기에 목숨을 맡겼다. 의료진은 '만성적이고 지속적인 식물인간 상태'라고 퀸란을 진단했다. 퀸란의 아버지는 딸에게서 호흡기를 떼어달라고 병원에 요구했다. 의료진은 "아직 뇌사에 이르지 않았다"며 거절했다. 퀸란이 빛이나 소리에 미약하게나마 반응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퀸란의 아버지는 결국 "'딸을 죽일 권한'을 달라"고 대법원에 요청한다.
의료진의 대답, 즉 '과학'에서 작은 명분을 찾은 대법원은 퀸란 아버지의 의견에 따라 호흡기를 떼라고 의료진에 명령했고 퀸란은 호흡기에서 벗어났다. 그런데 퀸란은 이후 10년을 더 산 뒤 1985년에 사망했다. "곧 죽을 것"이라는 의료진의 판단도, "그렇다면 죽이라"는 대법원의 판결도 모두 빗나간 셈이다. 당시 법과 과학이 벌인 줄다리기는 '존엄사를 시키려면 환자가 적어도 뇌사상태에 이르러야 한다'는 기준을 만들었다. 수 십 년 전 미국 사회를 달군 법과 과학의 상호조율 과정은 이른바 '김할머니 연명치료 중단사태'로 21세기 대한민국 사회에서 재현됐다. 황우석 사태, 광우병 사태, 천안함 사태 등 법이 과학을 법정에 불러세울 수밖에 없고 그래서 더욱 첨예한, 또한 아직도 해답을 찾기 어려운 이들 사태의 다양한 원형이 '법정에 선 과학'에 담겨있다.
김효진 기자 hjn25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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