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명훈칼럼]왕 회장의 빛바랜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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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문득 발견한 한 장의 빛 바랜 사진. 잊혀졌던 사연이 되살아나고 아련한 그리움도 묻어 난다. 추억은 소중하고 과거는 대개 아름답기 마련이다.


요즘 낡은 필름으로 되살아나 우리 곁으로 돌아온 인물이 있다. 왕 회장(고 정주영 현대그룹 창업자)이다. 동영상으로, 흑백 사진으로 신문방송에 등장하는 일이 잦아졌다. 경제위기 과정에서 동영상 광고를 시작한 곳은 현대중공업이다. '정주영'하면 '하기는 해봤어?'라는 말이 떠오를 만큼 불굴의 기업인으로 각인돼있어 위기극복 캠페인 광고이겠거니 싶었다.

얼마 전부터는 또 다른 모습의 왕 회장이 등장했다. 아들인 고 정몽헌 현대그룹 회장과 나란히 서있는 사진도 선보였다. 현대그룹의 신문광고다. 기업이 광고를 낼 때는 이유가 있는 법이다. 고인이 광고에 등장하는 것은 극히 이례적이다. 이를 감안하면 현대그룹 광고는 흔한 광고가 아닌 게 분명하다. 그렇다. 한눈에 속내가 드러난다. '현대건설의 정통성은 현대그룹이 가지고 있다'는 선언이다. 매물로 나온 현대건설을 타깃으로 사람들의 감성을 자극하는 여론전 성격의 광고다.


왕 회장의 생전 모습을 보면서 떠오르는 감상은 사람마다 다를 것이다. 나는 개인적으로 30여년 전의 '쑥스러운' 질문이 떠오른다. 왕회장은 당시 현대그룹 회장에 전경련 회장으로 왕성한 활동을 벌이던 60대 중반의 나이였고, 현대그룹에는 건설, 자동차, 종합상사, 중공업 등이 맹위를 떨치고 있었다. 그런 시절 대한민국 최고 재벌의 총수에게 던진 질문이 "현대그룹 여러 계열사 중 어떤 회사가 가장 맘에 듭니까?"였다. 유치원생의 호기심같은 우문이다.

기대는 크지 않았다. 직원들이 귀가 있고, 깨물어 안 아픈 손가락 없다는데, 두루뭉술 적당히 대답하겠지. 그러나 대답은 의외로 명쾌했다. 주저하는 기색도 없었다. "건설이지, 현대건설. 건설이 제일 재미있어요."


우문에 현답이었다. 정 회장은 조금 더 설명했다. 무에서 유를 만들어 내는 일 - 허허벌판에 길을 내고, 항만을 건설하고, 치열한 수주경쟁, 무궁무진한 아이디어에 완공후 성취감 - 이처럼 재미있는 일이 어디 또 있나. 유치한 질문이 솔직한 대답으로 빛나는 순간이었다.


그런 현대건설이 부실의 멍에를 쓰고 채권단에 넘어간 지 10여년. 절치부심 되살아나 인수합병(M&A)시장에 매물로 나왔다. 인수전은 현대차그룹과 현대그룹의 경합으로 압축됐다. 왕 회장의 아들과 며느리의 싸움이라고 세상은 쑥덕인다. 장자냐, 적자냐 하는 말도 나온다. 현대가문의 애증의 역사가 다시 화제에 오르고, 그것이 현대건설이 가지는 무게를 압도한다.


'현대가의 싸움'으로 비춰지는 것이 이번 인수전의 불행한 구도다. 한 장의 사진이 추억을 불러 오지만 그것은 과거사일 뿐. 채권단의 특별지원을 받았고 공적자금이 투입된 공적 영역의 기업이다. 현대건설 매각은 친자확인도, 상속절차도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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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경꾼의 호기심이 현대건설의 명운을 결정하는 것은 더욱 아니다. 현대건설은 대한민국 간판 건설업체다. 감성보다 이성, 가족사가 아닌 경제원리, 나아가 한국 건설업의 꿈과 비전을 담은 잣대로 주인을 찾아야 함은 물론이다. 채권단의 책무가 무겁다. 몸값 올리기에 매달린다면 '승자의 저주'가 부메랑이 돼 채권단을 후려칠 수 있다. 인수보다 중요한 것은 인수 이후다.


과거는 추억으로 묻고 공적 영역으로 들어온 현대건설의 현실을 직시하자. 회사 미래에 방점을 주자. 인수희망 기업 면접이 있다면 이런 질문은 어떨까. " 건설이 정말, 다른 사업 제치고 제일 재미있겠어?"


박명훈 주필 pmho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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