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동확의 수화 김환기의 고향 안좌도 여행<1>


막연히 서남해안 모든 섬을 순례하겠다는 서원 세운 적 있다


젊은 날, 내륙 태생으로서 막연히 바다를 동경해온 나는 남해안과 서남해안의 모든 섬을 순례하겠다는 서원(誓願)을 세운 적이 있다.
첫 방문지는 거문도. 거기서 나는 푸르디푸른 바닷물과 하늘을 배경으로 보이는 하얀 등대. 칠흑의 바다를 지키는 외로운 등대의 불빛과 쏟아질 듯 반짝이는 남국의 별들과 만난 적이 있다.
망망대해의 섬 한 구석 산기슭에 자리 잡은 이국 병사들의 비석과 나무 십자가의 기억이 뚜렷하다. 파도치는 바다 저편에 외롭게 떠 있는 무인도인 백도. 그 섬으로 향하는 동안 미지의 세계로 들어가는 데서 오는 막연한 두려움과 흥분을 동시에 느낀 바 있다.


그 첫 섬 방문에서 지금껏 잊지 못하고 있는 추억은 다름 아닌 풍란. 난 상륙하지 못한 채 한 바퀴 도는 것으로 만족하며 회항 했던 백도행 유람선 안에서 막힌 바다 한 가운데서 그 향기로 길 잃은 뱃사람들의 방향을 잡게 한다는 풍란의 얘기를 듣곤 그 매력에 빠져든 적 있다. 그러면서 한때 나는 나의 시가 풍란의 향기가 난 바다에서 풍랑으로 표류하거나 난파한 어부들을 무사히 귀향하도록 하듯 길 잃은 동시대인들의 길잡이가 되기를 바란 적이 있다.
그러나 현재 나의 시는 까마득한 거리의 가파른 해벽에 뿌리내린 풍란들처럼 멀리서도 느낄 수 있을 만큼의 향기를 내뿜고 있는 것일까. 여전히 모든 것이 불투명하고 혼돈일 뿐인 중년기. 나는 그에 대해 자신 있게 묻지 못한다.

다만 늙고 타락한 마음 한 구석에 지금도 서른아홉 개로 이뤄졌다는 백도. 흰 수직의 암벽 사이에 뿌리내린 채 자생하고 있을 풍란의 향기가 밀려오는 듯하다. 거문도항에서 일박하며 보았던 밤하늘을 밝히는 등대 불빛과 수평선 위 갈치잡이 배들의 집어등 불빛, 그리고 해변의 나무숲을 거슬러오는 파도소리들이 바로 어제인 듯 생생하다.
그렇게 시작된 나의 섬 기행. 그러나 나는 왜 바다에, 그중에서도 서남해안의 모든 섬을 순례하고자 했던 것일까. 여전히 난 그 까닭을 모른다. 단지 자신도 모르는 그 어떤 힘이, 나를 한없이 이곳으로 밀어내고 있었다고나 할까. 나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흑산도, 임자도, 청산도, 비금도를 떠돌았다. 그러면서 혼자 또는 여럿이 염전과 봉화대, 대파 밭과 소작쟁의 현장 등을 찾아다니며 적지 않은 사람들과 풍경들을 만나곤 했다. 거의 십여 년간 중단되어 있던 동안에도 내 마음은 늘 낯선 항구나 선착장 근처를 배회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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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마음은 늘 낯선 항구나 선착장 근처를 배회하고 있었다



그래서일까. 내 영혼의 분신들이라고 할 수 있는 나의 시 속에 흑산도 각시당 처녀와 청산도 밭둑머리의 애기 동백이 어느새 당당히 진입해왔다. 강진 마량 앞바다와 남서해안의 해안 도로들이 밀물처럼 수시로 내 시의 영역 속으로 밀려들어 왔다. 보길도와 신지도 등 완도와 해남의 섬들과 바다들에서 만난 햇빛과 바람, 구름과 파도가 대낮의 꿈속을 비집고 불쑥 고개를 내밀곤 했다. 어디 그 뿐이랴. 무심히 스쳐갔던 갯벌과 달랑게, 저녁노을과 칠면초, 이름 모를 포구와 고깃배들이 자신들의 존재를 알리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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