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빚 늘고 소송은 늑장" 밤잠 설쳐
단기 부채비율 어느덧 600%까지
시중은행의 통화옵션파생상품 키코(KIKO)에 가입했다가 피해를 입은 중소기업들은 요즘도 밤잠을 설치고 있다. 막대한 손실을 감당하면서 중도해지한 기업들은 잔고가 바닥나 있고, 아직도 계약이 유효한 업체들은 환율의 등락에 일희일비하며 얼마를 더 손해봐야 하는지 계산기만 두드리고 있는 실정. 은행을 찾아가 하소연해도 돌아오는 대답은 '노(No)' 다. 은행을 상대로 소송을 진행하는 업체들은 은행의 소송취하 압력에 힘겨운 날을 보내고 있다. 지난해 상반기 이후 현재 진행형이 되고 있는 키코 사태 그 후를 알아봤다.
요즘 일부 법무법인 사무실에는 키코 때문에 소송을 상담하러 오는 기업인들이 늘고 있다. 대부분 키코를 판매한 은행에 분풀이부터 시작했다. 그간의 마음고생이 심한 탓인지 입술이 까맣고 낯빛이 어두운 사람도 종종 있다. A법무법인 관계자는 " 우울증에 시달리거나, 병원에 입원한 사람도 있다"고 전했다. 실제로 어느 중소기업 오너는 과도한 스트레스로 인해 멀쩡하던 치아가 줄줄이 빠졌다고 한다.
지난해 한창 성장가도를 달리다 M&A분쟁을 겪은 IT분야 B사의 임원은 이 모든게 키코 때문이라고 일갈했다. 이 회사는 2000억원에 달하던 시가총액이 키코 때문에 3분의 1 토막이 났다. 경영권을 넘보려던 세력이 등장하면서 키코와 경영권에 회사의 모든 자원을 투입했다. 지난 1월에도 키코로 인한 손실이 91억원에 달했다.
비메모리 반도체 분야 C사는 지난해만 키코로 80억원의 손실을 입었다.작년 12월 31일 원/달러 1300원선을 기준 환율로 최종계약이 끝나는 2010년 7월까지 예상되는 손실은 무려 600억원. 키코 하나로 물린 돈만 총 680억원에 달한다. 이 회사 자본금(38억원)의 20배가 조금 못 미친다. 작년 매출(1600억원대)의 3분의 1을 키코로 날릴 판이다. 환율이 1300원을 넘으면 넘을수록 손실은 더 커지게 된다.
이 회사는 현재 은행을 상대로 소송을 벌이고 있다. C사 관계자는 "회사도 잘못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은행이 적합하지 않은 상품을 권유해 판매했다. 손실 치고는 너무 큰 피해를 입게 된다"며 억울해 했다. 어떤 식으로든 은행과 책임을 나누고 싶지만 은행은 안된다고 하고 정부, 금융감독당국은 뾰족한 대책을 내놓지 못하고 있다.
억울하고 분한 기업들은 법원에 호소했다. 을의 반란이라고 일컬을 정도로 기업들이 은행을 상대로 소송을 한다는 것은 계란으로 바위치기일 뿐이었다.
중소기업중앙회에 따르면 중앙회의 키코피해공동대책위에 가입한 250개 업체 가운데 현재 160개 업체가 소송을 벌이고 있다.이 가운데 가처분신청을 낸 업체는 60곳 정도다. 대양금속이라는 업체는 기업설명회를 갖는 자리에서 공개적으로 키코 손실 만회를 위해 본안소송을 추진하겠다고 말했을 정도다.
가처분신청에서 법원은 현재까지 8건 가운데 5건을 기각했다. 모나미와 디에스엘시디 등 3건은 환율급등에 따른 계약해지를 인정해 가처분 신청을 받아들였다. 4건에 대해서는 사정이 변경된 점을 인정하나 계약기간이 적다거나 고객보호의무를 다했다면서 기각했다.
하지만 상황은 지난 3월 9일 코다코가 HSBC를 상대로 한 소송에서부터 달라졌다. 법원이 환율급등에 따른 계약해지를 불인정했기 때문이다. 키코의 가처분은 주로 서울중앙지법 민사합의 50부에서 했다. 코다코의 경우 인천지방법원 민사30부에서 기각했다.
사정변경 원칙은 환율 급등으로 계약의 기초가 된 객관적 사정이 계약 후 현저히 변경되었기 때문에 기존 계약의 효력을 인정할 수 없다는 내용이다. 앞서 서울지법에서 내렸던 사정변경의 원칙을 재판부가 엄격하게 해석한 것이다.
게다가 지난 2월 서울지법 민사50부의 수석부장판사가 정기인사에서 바뀌면서 기업들의 초조함은 더해가고있다. 전임 수석부장판사의 경우 키코에 대한 위험성을 평가했기 때문. 신임 수석부장판사가 어떤 시각을 갖고 있느냐에 따라 향후 가처분신청과 본안소송에 중대한 영향을 미칠 수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은행들은 김앤장과 같은 대형 로펌을 동원하고 있는 점도 우려되는 대목이라는 것이다.
이 때문에 소송을 진행하는 기업인들은 패닉상태다. 은행의 권유와 회유, 유무형의 압력에 못이겨 키코에 가입했다가 손실을 본 기업들은 현재 단기 부채율이 예전 20~30%에서 500~600%까지 뛴 업체도 있다.
4월 말이 되면 중앙회의 공대위 업체 중 4월 중 65% 업체가 계약이 만료되고 35%는 여전히 남아 있다. 계약 만료된 경우는 가처분은 들어갈 필요없고 본안소송은 들어갈 전망이다. 중소기업계에서는 본안소송이 개시되면 또 다시 험난한 길이 닥쳐올 것으로 우려하고 있다. 현재 중앙회의 공대위에 소송을 제기한 160건은 한번도 변론한적이 없다. 기업이 제기한 소장에 은행답변서만 제출하는 수준. 재판부에서 변론기회를 잡아주면 재판정에 모여 진행을 하게 된다.
중앙회 김태환 통상진흥파트장은 "본안소송은 한 적이 없다. 최소 1년은 갈 것이다. 대법원까지 가면 3년"이라며 "장기전에 돌입하고 가처분은 계속 받아들여지지 않으면 소송비용은 또 따로 물어야 된다. 소송 끝나기 전에 부도나는 데도 있을 것이다"고 말했다.
이경호 기자 gungho@asiae.co.kr
조인경 기자 ikjo@asiae.co.kr
박충훈 기자 parkjovi@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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