섞음·기다림·배려…한식 DNA를 학술 언어로 풀다
정혜경 교수, 고조리서 마흔세 종 분석
전통 한식 가치 체계 세워
제철 식재료·발효 음식 등 가치 제시
K푸드가 세계적 인기를 얻고 있지만, 전통 한식의 가치를 규명하는 연구는 드물다. 김치와 비빔밥이 전부인 양 소비되는 동안, 수백 년 축적된 조리 철학과 식문화의 본질이 제대로 조명받지 못했다.
정혜경 호서대 식품영양학과 명예교수는 지난 18일 국가유산진흥원이 개최한 한식 포럼에서 전통 한식의 역사와 문화, 정서적 가치에 주목하며 현대적 확장 가능성을 제시했다. 전통 한식의 개념부터 새로 정리했다. 그는 "전통음식은 특정 지역이나 민족이 오래 먹어온 것"이라며 "조리 기술이 세대를 거쳐 전승되면 전통 한식이 된다"고 정의했다.
그의 설명에 따르면 한식은 한국 농수산물을 주원료로 전승된 조리법으로 만든 음식이다. K푸드는 조금 다르다. 한국 식문화의 대표성과 정체성을 지닌 음식에 현대의 기술과 가치가 더해진 창조적 음식문화다.
한식의 가치를 찾기 위한 방법론으로 정 교수는 네 가지에 집중했다. 고조리서와 유물·고문헌, 문학, 그림이다. 그는 "'음식디미방(1670년경)'부터 '조선무쌍신식요리제법(1924)'까지 시대별 고조리서 마흔세 종, 조선왕조실록·승정원일기 등 고문헌, 김홍도·신윤복의 풍속화, 춘향전·흥부전 등 판소리 소설을 분석했다"고 밝혔다. 이어 "박물관에 전시된 식기와 술잔도 연구 대상이었다"고 덧붙였다.
정 교수는 한식의 문화적 가치를 두 가지 측면으로 구분했다. 첫째는 음식이 한국 사회에서 어떤 의미를 매개했는지다. 그는 "조선 시대 판소리 소설과 시, 풍속화를 분석한 결과 힘과 약(藥), 정(情), 기원(祈願)으로 요약됐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음식은 사회적 힘의 구조를 드러내는 수단이자 건강의 철학이었고, 공동체의 정서를 잇는 매개이자 종교적 염원을 담는 도구였다"고 풀이했다.
둘째는 한식의 미학이다. 정 교수는 섞음, 기다림, 배려, 아름다움, 풍류 등 다섯 키워드로 정리했다. 섞음은 비빔밥과 구절판으로 상징되는 조화의 원리이고, 기다림은 장 담그기와 김치 숙성처럼 발효를 통한 시간의 축적이다. 배려는 상차림 구성에서 드러난다. 밥과 국, 김치와 장을 기본으로 손님 상태와 상황에 맞춰 반찬을 조율한다. 아름다움은 음식 담는 그릇과 색 배치에 담긴 미의식이며, 풍류는 술과 안주를 곁들인 주안상 문화로 구현된다.
이런 가치 체계는 최근 다양한 프로젝트의 밑바탕이 됐다. 경북 봉화 충재 종택은 금계포란상을 재현하고, 종가음식을 문화상품으로 개발했다. 문학 속 음식을 현대 식탁에 올리는 시도도 있었다. 온지음은 판소리 소설 심청전에 등장하는 밥상 차림을 현대적으로 구현했고, 디자인하우스는 다양한 문학 속 밥상을 선보였다. 하나같이 옛 음식을 복원하는 차원을 넘어, 전통 한식의 철학과 미학을 현대 음식 문화에 접목했다.
정 교수는 이런 흐름이 미래 대안 식량의 해법이 될 수 있다고 봤다. 제철 재료 중심의 자연 친화 철학이 지속 가능한 식량 체계의 밑바탕인데다 밥과 국, 반찬으로 구성된 상차림이 탄수화물, 단백질 등 영양소의 균형을 맞춘다는 이유에서다. 채소와 나물 위주의 식단은 식이섬유와 비타민도 풍부하게 제공한다. 김치와 장류, 젓갈 같은 발효 음식 역시 유산균과 효소의 보고다. 동지 팥죽, 설 떡국, 단오 수리취떡 같은 절기 음식은 공동체 문화를 이어주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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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 교수는 "글로벌한 시각으로 K푸드의 시스템을 구축하되, 알맹이는 전통으로 채워야 한다"며 "전통 한식의 근본을 정립하는 작업이야말로 지속 가능한 미래로 향하는 열쇠"라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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